다. 금제
禁制 이유는 계급적 규제와 사치억제에 있으며, 이로써 사회기강과 질서유지 및 경제안정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금제의 일면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의식이 많이 작용하였다. 특히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금제사항은 여성의 가체에 대한 것이며, 그 외에 복식부분에 대한 금제는 금은·직물·색 등에 나타나고 있다.
가체이 대한 금지조치는 영조대부터 시작되어 정조대까지 약 70여 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가체로 인한 사회적 물의에 대한 것은 이미 성종 12년(1481)부터 지적되었고 연산군 9년(1503)에는 “城中에 高髻를 좋아하여 머리의 크기가 사방 높이 1자나 되었다”720)고 할 정도였다.
영조 23년(1747)의 가체 논의에서는 남의 머리를 취하여 장식하는 것은 예가 아니지만 대신할 게 없으니 금하기 어렵고, 자기집 사람도 금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상류층에서 솔선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721) 동왕 32년에 비로소가체 대신에 족두리를 쓰도록 하는 전제로 가체금지가 시작되었다.722) 그러나 문제는 족두리도 궁중양식과 같고 값이 비싸기 때문에, 결국 가체금지령은 8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723)
정조 3년(1779)에도 조정에서 가체금지가 논의되었으나 화관은 비싸고 品服이기 때문에 안되며, 나무로 髮을 대신한 것은 궁중양식이어서 민간에서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영구히 시행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금할 수 있다고 보류되었다.724) 그 후 정조 12년 10월에 가체금지령이 실시되었으나 그대신 뒷머리가 커지고 비녀 등의 사치가 시작되는 등 문제가 여전하여 순조 30년(1830)에 다시 머리를 얹게 하였지만 실시되지 못하였다. 두발을 뒷통수에서 틀어 말고 비녀를 꽂는 쪽머리(北髻·後髻)는 순조 중엽 이후에야 정착되었다.725)
직물금제는 사치를 막기 위한 조치로 특히 혼례 때 紗·羅·綾·緞 등 비단사용을 금하였다. 성종 때부터726) 인조와727) 효종 때에는728) 평상복에도 신분에 따라 옷감의 섬세도나 옷의 크기를 제한하고 여성의 치마폭 등도 제한하였다. 숙종 때에는 외국으로부터의 직물수입도 억제하였다.729)
금제는 주로 일반백성에게 강요되는 것이 상례지만, 위에서 모범을 보여야한다고 하여 왕이나 재상가에서 솔선수범하기도 하였다. 특히 영조는 많은 금령을 내리면서 22년에는 청과의 문단무역을 금하기도 하였다.730) 한편 技巧紋이 있는 紗緞綾紬 사용을 금하며 지방의 織絞機도 철폐시키고,731) 국혼 때에도 면포를 사용하게 하고,732) 왕비와 빈궁의 法服도 향직으로 대신하도록 하며,733) 일본통신사가 바친 문단도 불사르도록 했다.734) 정조도 선왕의 뜻을 받들어 문단을 금하며 집안을 단속하라고 하였다.735)
그거나 이런 직물금제 조치의 여파로 상공업이 억제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 청으로부터 고급직물이 밀수되거나 수입되는 현상을 막지 못하여 국내 직물업의 침체를 가져왔다.
조선시대 禁制色은 황·자·홍·백·회·옥색이었으며, 이 중에서도 가장 자주 거론되었던 색은 황색과 백색이었다. 색상금제에서도 중국에 대한 사대관념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황색은 「中之色君之服」을 상징하므로 중국의 황제 이외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금지되었다. 황색금제는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영조736) 25년 具允明의 상서에 의하면 “중국의 제도는 천자가 황색 옷을 입으므로 신하들은 입지 않는데 우리 나라는 왕이나 신하가 모두 홍색을 입으니 옛날 명나라 사람들이 상하에 구별이 없다고 흉을 본적이 있었다…”737)고 하여 매우 조신하게 대처하고 있다. 황색금제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왕은 물론 백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자색이나 홍색은 「임금의 색」이라 하여 금하였다. 또한 염료가 귀하기 때문에 외국에서 비싸게 구입해야 한다든가738) 수령들이 진상을 핑계로 착취하여 민폐가 컸던 것도 큰 이유였다.739) 그러나 홍색금제는 논의가 자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런 예는 왕과 신하가 모두 홍색옷을 입는다는 지적이나, 상급관리에서 하급에 이르기까지 모두 홍색포로 정하고 있는 점에740) 잘 나타나 있다.
회색은 五行相剋이고741) 8賤 가운데 하나인 「승려의 의복색」이라 꺼렸고, 옥색은 백색에 가깝기 때문에 금하였다.742) 백색은 木制金으로 오행사상에 맞지 않으며 상복색이고 「音哀服素」743)라는 이유로 사용금지가 가장 많이 거론되었다. 영조 때 백색금지는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이 때 나타난 백의금제에 대한 사회적 인습은 오랜 습속에 익은 白衣선호와 오행사상의 양면에서 갈등을 보이고 있다.744)
720) | ≪燕山君日記≫권 48, 연산군 9년 2월 경술. 여기서 1자는 조선시대 布帛尺으로 환산하면 평균 46.80cm가 된다(李恩卿,≪韓國과 中國의 布帛尺에 關한 硏究≫, 서울女大 博士學位論文, 1993, 12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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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 | ≪英祖實錄≫권 70, 영조 25년 10월 무진. |
722) | ≪英祖實錄≫권 87, 영조 32년 정월 갑신. |
723) | ≪英祖實錄≫권 102, 영조 39년 11월 임술. |
724) | ≪正祖實錄≫권 7, 정조 3년 2월 경진. |
725) |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穚≫권 15, 東國婦女首飾辨證說. |
726) | ≪成宗實錄≫권 13, 성종 2년 12월 임신. |
727) | ≪仁祖實錄≫권 34, 인조 15년 5월 기묘. |
728) | ≪孝宗實錄≫권 18, 효종 8년 정월 기유 및 권 20, 효종 9년 10월 갑술. |
729) | ≪肅宗實錄≫권 56, 숙종 41년 9월 무술. |
730) | ≪英祖實錄≫권 63, 영조 22년 4월 병자. |
731) | ≪英祖實錄≫권 63, 영조 22년 4월 신사. |
732) | ≪英祖實錄≫권 102, 영조 45년 2월 갑술. |
733) | ≪英祖實錄≫권 68, 영조 24년 11월 을묘. |
734) | ≪英祖實錄≫권 68, 영조 24년 8월 기해. |
735) | ≪正祖實錄≫권 24, 정조 11년 9월 계사. |
736) | ≪太祖實錄≫권 9, 태조 5년 6월 을미. |
737) | ≪英祖實錄≫권 70, 영조 25년 10월 경진. |
738) | ≪世宗實錄≫권 34, 세종 8년 12월 을축·권 35, 세종 9년 2월 정축 및 권 123, 세종 31년 정월 병오. |
739) | ≪中宗實錄≫권 15, 중종 7년 2월 을유. |
740) | ≪續大典≫권 3, 禮典 服. |
741) | 梁誠之,≪訥齋集≫권 4, 奏議, 便宣32事 신묘 12월 4일. |
742) | ≪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4월 갑술. |
743) | 李睟光,≪芝峰類說≫권 3, 君道部 法禁. 李裕元,≪林下筆記≫권 16, 文獻指掌編 6. |
744) | ≪英祖實錄≫권 47, 영조 14년 8월 병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