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포류
袍는 시대에 따라 같은 종류에서도 외형상 크기에서 조금씩 변하였는데 조선 후기는 독창적인 포류가 정착된 시기라는 데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는 조선 초기의 풍성하고 여유있던 피복문화가 후기에 이르러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도 간소화함을 의미한다. 또한 다양했던 袍문화가 왜소화하고 단일화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즉 초기에는 전체적으로 풍성한 길고 넓은 모양이던 것이 중기 말에 오면 품은 실용적인 치수로 차츰 단소화하는 반면에, 소매는 절구통형의 넓은 모양으로 변하였다. 또 腋注音
이라든가 옆이 트이고 무가 이중으로 된 直領袍는 사라지고, 長衣·帖裏·褡·道袍·氅衣類가 정착되었다(<사진 2>). 조선 후기의 편복 중에서 가장 많이 입었던 포류로는 장의·창의·도포가 있다.
가) 장의
長衣는 다른 옷들에 비해서 조선 초부터 말까지 치수나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이 가장 안정되고 실용적인 옷으로 상하층이 모두 이용하여 온 일반 편복의 포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남성이 장의를 사용했던 예는 역대 왕의 대·소斂具에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 말엽에는 사대부의 愼終錄에서도745) 보인다. 남자의 장의는 중기 이후 도포와 창의류 등의 편복에 의해 잠시 밀려났다가 고종 32년(1895) 衣制改革 때 「周衣」라는 명칭으로 다시 출현하게 된다.
여성용 포는 남성에 비해 매우 귀한데 그 중에서도 남녀 공용인 장의가 일반 여성의 유일한 포로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 말까지 이용되었다(<사진 3>). 후기에 와서 장옷은 포 외에도 외출 때에 여성의 쓰개용(<사진 4>)으로 쓰였고746) 이것들은 조선 말에 두루마기(周衣)로 이어졌다.
나) 창의류
창의류는 양란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중·후기에 출토되는 의류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氅衣」라는 명칭은 ‘트임이 있는 袍’라는 뜻을 담고 있다. 창의는 트임의 위치, 소매의 크기, 襈(緣)의 유무, 사용자 및 용도에 따라서 달랐다. 창의류는 남성전용이었으며, 형태는 트임이 뒤에 있는 것과 옆에 있는 것, 소매가 넓은 것과 좁은 것, 선(연)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었다. 옷감은 명주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으며, 바느질로는 누빈 것이 가장 많고 겹이나 솜옷도 있었다. 정조년간에는 朝官이 공복일 때는 청색 창의를 입는데 집에서는 흰색을 입도록 한 것은 낭비라는 비변사의 건의대로 따르게 하였다.747) 또 순조 때는 文蔭官은 첩리 대신으로도 입도록 하는 등748) 겉옷(表衣)으로 착용되기도 하고 다른 포류의 안에 받쳐 입는 받침옷(中衣)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명칭은 형태에 따라 「大氅衣」·「中致莫」·「小氅衣」·「창옷」·「鶴氅衣」 등 다양하다.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창의는 「큰창의」 또는 「창의」라고도 했는데, 중기 이후는 편복용으로 창의류 중에서 가장 상위의 개념으로 이용되었다. 모양은 소매는 넓으며 뒤가 트이고 옆에 무가 달려서 앞에서 보면 도포처럼 보이지만, 도포의 뒷자락에 있는 展衫이 생략된 것이다(<사진 5>), 대창의는 사대부들이 집안에 있을 때 입는 燕居服으로, 간단한 나들이 때에는 겉옷으로, 또는 도포 속에 입는 받침 옷으로 이용되었고, 허리에는 신분에 맞는 색의 細絛帶(술띠:가는 띠)를 맸다.
중치막은 소매가 넓고 양쪽 옆이 트인 「세 자락형」 옷이며, 대창의에 포함시키기도 하는데749) 대창의에 비해 하위개념의 포이다. 집안에 있을 때나 도포를 입을 때는 받침 옷으로 이용되었다(<사진 6·7>).
창옷은 「소창의」와 같은 뜻으로, 명칭에서 시사하듯이 「작은 창옷」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형태도 좁은 소매에 옆은 무도 달지 않고 트인 세 자락형이며 (<사진 8>), 허리에 세조대를 맬 수 없다. 입는 사람도 신분이 낮은 衙前이나 하인배들이었으므로 사람을 비하시켜 부를 때 ‘창옷짜리’라는 말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학창의는 덕망이 있는 사대부들이 집에 있을 때 입는 연거복으로 모양은 대창의와 같으나 옷의 가장자리에 검정색의 덧단(襈;緣)을 댄 것이다.
다) 도포
도포는 「道服」이라고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성인 남성들의 대표적인 통상예복이었다(<사진 9>). 사용시기는 기록이나 실물에 의해 임진왜란 이후부터로 보고 있다. 기록에는 선조 40년(1607)에 “李弘望이 草綠道袍를 착용했다”750)는 것이 처음 보이며, 실물도 17세기 후반부터 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 있으나 다른 옷들에 비해서 매우 희소하다. 출토물은 耽陵君■(선조의 증손;1636∼1731), 東萊 鄭氏(1574∼1669), 豊山 洪氏(鑑輔;1699∼1763) 등의 것이 있는데, 옷감은 명주나 亢羅로 하였다.
도포는 관복에 대치할 만큼 공식적이거나 사사로운 행사 때 갖추어야 하는 통상예복이며, 포 중에서는 최상의 개념이 부여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통상예복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상류층 전용이었으며, 따라서 신분적인 규제가 가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李圭景은 “도포는 靑·白의 두 가지가 있다. 청은 吉服이고 평상시는 흰색을 입으며 賤民은 못 입는다”751)고 하였으며, 丁若鏞도 “民奴나 下賤이 도포를 입고 있다”752)고 지적하고 있다.
도포의 형태로 보면 넓은 소매에 옆선에 무가 있으며 뒷중심이 트이고 그 위에 전삼이 있어서 트임을 가릴 수 있도록 하였다. 허리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세조대를 매는데 홍색이 가장 높은 지위를 나타낸다. 제작상 특징은 다른 일상용 포류는 솜을 넣은 것과 겹이나 누빈 것도 있는 반면, 도포는 홑으로 만들었다.
도포는 고종 때 의제개혁 이후에도 유림에서 철저히 고수되어 근래까지 전해져 오는 편복 중에서 최상의 상징물로 존재하고 있다.
라) 왕비의 포
왕실예복의 포류에 대한 기록에는 翟衣·露衣·장옷·圓衫·활옷·唐衣가 보인다. 적의는 왕비복의 상징인 궁중 법복이며 大衫이다. 명에서 君王妃·親王妃禮에 의해 보내온 賜與冠服이며 임란 후에는≪국혼정례≫를 통해 우리 나름대로 이루어졌다.≪국혼정례≫의 빈궁의복 안에 노의·장삼·원삼이 있고, 조선 후기에는 큰 소매에 속하는 것들이 원삼 하나로 집약되어 적의와 함께 조선 말까지 이르렀다.7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