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저고리류
가) 저고리
저고리는 우리 나라의 상의를 상징하는 옷으로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크기나 형태에 약간씩의 변화를 보이지만 전통 고유의 한복 가운데 가장 정형화된 옷 중의 하나이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저고리 형태는 길고 넓은 모양이었으나, 후기에 오면 체형에 맞는 모양으로 되었다가 점차 단소화되었다. 실물이나 그림·문헌자료에 의하면 17세기 중반부터 특색을 보인 「당코형깃」이 좀더 부드러운 모양으로 나타나고(<사진 10>) 영·정조대 이후 단소화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저고리의 단소화현상에 대한 사회의 시각은 비판적이었다. “지금 부녀의 저고리 소매는 좁고 길이는 짧은데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귀천이 모두 같은데 참으로 놀랍고 괴이하다”754)고 하였으며, 18세기 말에는 여인의 저고리는 날이 갈수록 짧아지고 올라가서 가슴이 보일 정도이고 치마는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755), 조선 말기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져 “저고리의 길이는 짧고 품은 좁아서 옷고름을 매어 가슴을 감쌀 수 없고 소매는 좁아서 겨우 팔뚝을 용납할 정도이다”756)라고 하였다.
저고리의 배래선이 곡선으로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부터이다(<사진 11>).
나) 당의
唐衣의 발생시기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규정짓기는 매우 애매하다. 다만 조선 후기에 오면 전기에 있던 「옆트임저고리형」이 사라지고 그것과 비교하여 길이가 길고 옆트임이 확실히 구분됨으로써 겉옷으로서 완전히 독립된 형태로 정착되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옆트임저고리에 비해 당의라고 볼 수 있는 형태를 지닌 실물은 출토물로서 淸衍郡主(1754∼1821)의 무덤에서 나온 것(<사진 12>)과 지상물로서德溫公主(1822∼1844)의 것이 있다. 청연군주의 당의는 저고리 60점과 치마 26점, 大禮服 2점과 함께 나온 것으로 25점이나 된다. 이 당의는 당시 저고리가 단소화 추세였던 것과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소매는 窄袖(좁은 소매)이면서 길고, 길이는 앞 뒤 모두 길어지면서 품은 좁고 옆선이 겨드랑이 바로 밑에서부터 아래로 트여 세 자락 형태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사진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