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의료직조
조선시대의 주된 옷감 衣料는 무명(綿布)·삼베(麻布)·모시(苧布)·명주였으며, 가내수공업이나 민간수공업에 의해 자급자족 형태로 생산되었다. 무명이나 베는 세금납부·물물교환 등에서 화폐적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가) 면포
綿業은 고려말 이후 일반화되기 시작하여 조선 태조 7년(1398)에는 “10년이 지나지 않아 전국에 두루 퍼졌다”759)고 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세종대에는 면업을 변방정책의 일환으로 장려하여 동북면과 서북면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동왕 27년(1445)에는 면포의 가격을 모든 조세의 기준으로 삼았다.760) 이러한 국가시책으로 면업은 염업·광업과 함께 3대 기간산업으로 발전하였고 면화재배와 면포생산은 시장발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면포는 마포보다 더 유리한 직물로써 생산이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16세기에는 일본·여진 등과의 국제무역에서 활발하게 수출되었다.
조선 후기에 오면 田稅를 면포로 낼 정도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면화가 황해·평안도에까지 널리 재배되었으며 농가의 부업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생산수준은 21升의 細布를 짤 정도로 발전하였는데 세포는 값이 비싸서 일부 상류층에서만 애용되었다. 면포는 軍布로서도 징수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白骨徵布」가 성행하는 등 수탈이 강화되면서 면업의 발달이 저해되었다. 또한 영조 34년(1758)에 淸布의 수입을 금지하고 국내 목면을 쓰도록 할 정도로761) 청나라 燕京으로부터 청포의 수입이 늘어났으며, 헌종 9년(1843)경에는 기계제품인 西洋木이 수입되었다. 수입포에 의한 압박이 심해짐에 따라 국내 면업은 크게 타격을 받게 되었다.
나) 삼베와 모시
삼베는 면직물 유통이 활발해지기 이전인 세종대에는 5승포가 正布로서 물품화폐로 쓰였으며, 조선 후기까지도 서민의 여름용 옷감과 상복으로 필수품이었다.
삼베는 세종대에 함경도 서북지방에서 많이 생산되었는데, 특히 慶源·會寧·鍾城·穩城·慶興·富寧 등 6진에서 생산되는 「六鎭細布」를 최상품으로쳤다.762) 그것은 곱고 올이 가늘기가 매미날개 같아서 한 필을 움켜 잡으면 한줌 안에 들 정도였다. 또 한필을 바댓대 안에 넣을 수 있다 하여 「鉢內布」라고도 하였다. 강원도에서 생산되는 것은 「江布」라고 하였는데 질이 좋지 않아 常布로 쓰이거나 상복에 쓰였으므로 「喪布」라고도 하였다. 경상도에서 나는 것은 「嶺布」라 하였는데 특히 「安東布」가 유명하였다.
삼베나 모시는 지역과 계절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생산량이 저조했으나 직조기술은 명과 청나라 수준으로 발달하여 歲貢品으로서 중국에 수출되었다. 특히 모시의 직조술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중국에서 인정할 만큼 발달하였으나 지역적으로 생산지의 제한을 받고 제직공정과 실용적인 면에서 고급직물에 속하여 일반화가 어려웠다. 조선 후기에는 韓山·舒川·鴻山·庇仁·林川·定山·藍浦 등이 「苧布七處」의 명산지로 일컬어졌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한산만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다) 명주
명주는 사치금지와 엄격한 신분체제에서 고급옷감의 생산이 저해되는 가운데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었다. 특히 일반 민들에게는 ‘명주가 비단’이라고 할 만큼 婚需나 壽衣를 만드는 데 가장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명주생산을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누에치기와 뽕나무 재배를 장려하고 왕실에서도 親蠶禮를 행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기도 하였다. 명주생산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는 세종·성종·중종·영조대였고, 영조는 43년(1767)에는 景福宮 안에서 친잠례를 거행하고 전국 감옥의 죄수를 풀어주기도 하였다.763)
생산지는 우리 나라 전역에 비교적 고르게 퍼졌는데 그 중에서도 황해도의 명주실과 명주가 유명하였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견직업이 발달하였다. 조선 후기에 명주의 산지로는 成川·寧邊·羅州를 꼽을 수 있다.764)
<高富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