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사관의 발전
조선 후기의 성리학과 실학 사이에 있어서 화이관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그 역사관의 차이이기도 했다. 실학자들은 문화를 기준으로 한 화이관으로 전환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홍대용은 域外春秋論을 제시했고, 정약용은 중화와 이적의 구별이 道와 政에 있는 것이지 강역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463)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역사를 성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학문체제로 인식했다. 실학자들은 당시의 經傳的 사서였던≪資治通鑑綱目≫에 대하여 일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주자의 학문적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송학 위주의 윤리도덕적 역사인식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이는 史學을 經學 내지는 應用經學的 존재로 인식하던 단계를 벗어나 독자적 학문으로 인식해 가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발전은 물론 조선 초·중기에 비해서는 진전된 것이지만 완벽한 역사의 독자성 인식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464)
실학자들은 역사학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에 점차 접근해 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와 구별되는 自國史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도 강화시켜 나갔다. 그들은 전통적 화이관의 극복을 통해 중국 중심의 역사인식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자국사에 대한 독자적 인식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국사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과거시험에 국사과목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실학자들은 또한 正統論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조선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익의<三韓正統論>은 檀君-箕子-馬韓으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주장했으며, 안정복은 이를 계승하여 檀君-箕子-馬韓-三國-新羅로 연결되는 정통론을 주장했다. 조선사에 대한 정통론의 적용은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를 내세웠던 주자학적 정통론과는 달리, 우리의 역사가 중국사와 대등하게 그 시종이 전개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통론이 적용되는 한 역사서술이 명분적 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실학자들은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의 원동력으로 성리학적 윤리성를 거부하고 地理를 주목하거나 시세를 논하기도 했다. 즉 고금의 성패는 시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통치자의 재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時勢論이 등장하여 역사에 대한 도덕적·영웅주의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아가 정약용은 과학기술적 측면에서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465) 물론 이러한 논리가 역사의 원동력을 이해하고 인과관계를 구명하며, 역사의 발전을 논하는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역사연구방 법론에 있어서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앞 시기에 비해 진전된 측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의 객관적 인식에 필요한 문헌사료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사료의 광범위한 수집과 활용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의 백과전서적 경향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사료에 대한 깊은 관심은 역사연구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귀납적 실증주의와도 관련되는 것이었다.
실학자들은 특히 중국의 사적에 수록되어 있는 국사자료의 제약성을 인식하고 국내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오류가 많은 중국측 사료보다 사실을 분명히 전하는 국내사료가 더 귀중함을 말하였고, 국내 관찬사서와 야사 및 문집까지 참작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주체적 국사인식을 위한 방법론상의 발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엄격한 사료고증은 전통사관의 도덕주의적 한계를 벗어난 역사의 객관적 인식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의 역사서술에 있어서는 ‘述而不作’의 정신에 입각하여 史實의 객관적 인식을 존중하고 사실에 정치적·윤리적 해석이 가해짐으로써 왜곡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한 사실에 반대되는 자료들을 동시에 제시하여 객관적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자료의 윤색을 거부하고 저술에 본명의 철저한 直書를 주장하여 사실의 객관적 인식과 서술을 존중했다. 그러나 객관성을 추구하였다고 해서 성리학적 문화풍토에서 완전히 벗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실학자들은 역사서술 형식에 있어서도 史體의 선택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범례를 명확히 세워 국사의 체계적 서술을 이룩하고자 했다. 전통적 사체에 대한 인식의 심화 속에서 안정복은 編年綱目體로, 李肯翊은 紀事本末體로, 韓致奫은 紀傳體의 형식을 빌어 우리 역사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체는 전통적인 것으로 역사의 내적 원동력과 발전·변화의 논리에 입각해 역사를 체계화하는데 미치지는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역사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나 인물의 폭을 확대하였다. 즉 그들은 역사의 인식대상을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확대했으며, 고대사에서부터 당대사에 이르기까지 그 인식의 시대적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다. 그들의 역사서술에서는 한반도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 요동과 만주 일대까지 민족사의 무대로 파악하여 고구려의 역사전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그리고 양반사림 중심의 역사인식 태도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건과 그 주체적 인물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시도했다.
요컨대 조선 후기 실학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대외관과 역사인식에 있어서 성리학적 견해와는 다른 해석들이 제시되었다.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이 때에 이르러 중국중심주의적인 전통적 화이관을 극복했었고, 조선중심사상적 사고방식이 나타났다. 성리학계에서는 淸=夷狄論의 입장에서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이며 보존자인 조선의 존재와 그 문화적 사명을 확인했다. 반면에 실학자들은 중화의 기준을 문화로 설정하게 됨에 따라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이해에 접근해 갔다. 그들은 청에서 전개되고 있던 중화문화의 수용책을 제안했으며, 일본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시도했다. 그리고 서양문물의 선별적 수용론을 펴기도 했다.
이러한 대외관의 전환과 깊은 관련을 가지며,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경학과 사학의 구분을 시도하여 사학의 학문적 독자성을 확인해 갔다. 또한 시세론 등을 통해서 도덕주의적 역사해석을 수정하고자 했다. 그들은 조선중심적 사고방법과 관련하여 조선문화와 역사의 독자성을 서술하기도 했다. 사료의 광범위한 수집과 정리를 주장하며 역사서술의 대상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대외관과 역사인식은 성리학의 그것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것으로 실학과 성리학의 경계를 선명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