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상공업진흥론
원초유학에서 제시하고 있었던 왕도정치론에서는 仁政의 지표 가운데 하나로 상인과 匠人을 보호하는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시도하며 실학사상이 제시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선진시대와는 달리 상공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던 단계였다. 그리하여 실학자들은 선진유학에서 제시하고 있었던 工賈에 대한 보호논리와 조선 후기의 상공업계의 발전단계 등에 영향을 받아서 상공업진흥론을 전개했고, 화폐의 유통정책에 적극적이었으며, 광업의 개발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왕도정치의 재현을 시도하던 실학자들이 상공업진흥론을 개진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었다.
우선 상업에 대한 실학자들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상업을 賤業視하는 末業觀과 상인의 관직진출을 막는 禁錮法의 철폐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유수원이나 정약용에 의해서 강하게 제시되고 있었다.473) 그들이 상인에 대한 금고의 철폐를 주장한 것은 遊食兩班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다. 한편 실학자들은 상업발전론을 직접 제시해 보였다. 그러나 유형원 단계의 실학에서는 농본적 입장이 견지되면서 농업생산 중심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은 범위 내에서만 상업을 한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활동한 柳壽垣의 단계에 이르러 실학의 상업론은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유수원은 상업자본의 육성을 전망하면서 대상인에게 禁亂廛權과 같은 전매특허를 주어야 한다고 했으며, 영세상인의 자본을 합자시켜 대규모의 상인자본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금난전권의 보장을 요구한 것은 국가재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할 수 있는 상업세의 증수에 직접적인 목적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금난전권 보장의 논리는 당시 상업의 발달 정도가 미미하여 대자본의 육성을 통한 발전책을 마련하려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수원은 지방도시의 상업발전을 위해서 정기시장의 상설화를 주장했고 농촌지역에 정기시장의 개설을 장려하고자 했다.474)
그러나 정약용은 특권상업 및 매점상업에 대한 반대론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는 이미 18세기 이후 발달한 특권 및 매점상업에 의한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先王의 法’을 들어서 상업이윤을 확보하고 있던 상인들에 대한 상업세의 증수를 꾀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 稅課司나 督稅司와 같은 세무관서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상업세의 증수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안했다.475) 한편 박제가는 재화가 잘 유통되어야 전국적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같아져서 백성이 이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박제가와 이규경·최한기 등은 해외통상의 발전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민간에 대한 규제를 풀고 이들도 해외통상에 종사하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생각은 왕도정치론에서 제시되고 있는 상인보호의 논리를 빌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당시 조선사회의 현실적 요청을 반영한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상업뿐만 아니라 수공업분야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박지원·박제가 등 실학자는 방직분야 등에서 보이는 낙후된 국내기술을 발달시키고 생산력의 향상을 통한 國富의 증대를 목적으로 하여 선진기술을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도 중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利用監과 같은 관청을 설치하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선박과 수레 제조기술을 장려하기 위해서 典艦司나 典軌司와 같은 관청을 중앙정부에 설치해서 정부 주도로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공업에 이어서 화폐유통에 관한 실학자의 견해를 살펴보자. 당시 17세기 이후 조선사회에서는 화폐의 전국적 유통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면서 화폐유통에 대한 부정론과 긍정론이 등장했다. 특히 18세기 초 발생한 錢荒 또는 錢貴현상의 등장 이후 화폐제도나 유통을 개선시키려는 개혁론이 실학자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화폐유통에 대한 긍정론은 유형원과 유수원(1694∼1755), 박제가 등은 화폐유통에 대한 긍정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익·이규경은 화폐유통에 수반되는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정약용은 화폐제도 개선을 요구한 경우로 분류될 수 있다.476)
유형원은 화폐유통에 긍정적이었다. 그는 중국 및 고려시대의 화폐유통을 연구하여 국내에서 銅錢유통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고, 화폐를 식량과 함께 민생의 근본으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화폐주조의 국가관리를 주장했고, 화폐체재 및 품질의 규격화를 논했다. 그는 화폐원료의 공급 및 화폐주조량의 결정문제에 대해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그는 화폐의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화폐의 유통가치를 결정해 주고, 국가의 수입과 지출을 貨幣納化하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상설점포의 설치를 제안했고, 물품화폐였던 麤布의 유통금지를 주장했으며, 官用費를 금속화폐로 지급할 것 등을 건의했다.
반면에 이익은 화폐유통에 비판적이어서 廢錢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상품 교환수단으로서 동전의 기능이나 가치는 원칙적으로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지역의 협소성 및 재화를 운송하기 위한 교통의 편리를 들어 금속화폐의 유통에 부정적이었다. 그가 부정적 화폐관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은 동전유통으로 인해 상업의 발달이 촉진되고 이와 병행하여 고리대가 성행해서, 농민의 몰락이 촉진되고 농업의 위축되던 현상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화폐의 보급으로 인해서 관리의 탐학이 가중되고 도적이 횡행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화폐의 유통으로 인해서 소비와 사치풍조가 유행하고 민심의 변화가 촉진되는 등과 같은 전통적 생산양식이나 가치체계의 변질을 걱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동전유통을 금지하고 물품화폐로 복귀하는 문제를 생각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화폐유통의 현실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농본적인 절약론의 입장에서 화폐유통의 구조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화폐가 상품유통의 매개체로서 국가경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당시 화폐정책 및 화폐제도의 개혁과 전황을 극복하려는 개혁안을 제시했다. 典圜署를 설치하여 화폐주조 관리체계를 일원화하고 화폐의 품질과 체재를 개선하려고 했다. 또한 화폐제도의 개혁안으로 동전을 가장 이상적인 화폐로 생각했으나 고액전의 통용 및 金銀貨의 주조를 제안했다. 한편 박제가는 良貨의 주조와 화폐통일을 상품유통의 장려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조선 후기 사회는 광업분야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는 매뉴팩쳐단계의 德大制 광업경영이 진행되었다. 동시에 농민층 분화와 관련하여 광산노동자가 증가되었고, 이로 인해 농업노동력의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광업의 발달은 전답과 봉건질서를 함께 파괴시켜 갔다. 그리고 鑛稅의 징수문제, 금은의 국외유출 등에 따른 손실 등 여러 문제가 수반되었다.477)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형원은 광업에 대해 工匠稅 징수 등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지만, 官營制보다는 私採制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익은 농사에 피해가 없는 한 광산개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과중한 징세로 인해서 광업개발이 위축된다고 하여 당시 시행되었던 設店收稅制의 보완을 요구했다. 이외에도 박지원·박제가·서유구·이규경 등과 같은 실학자들은 대체로 설점수세제에 의한 광산개발을 인정하면서 광산물의 효율적 활용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478) 이렇듯 당시 실학자들은 산업에서 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도 독립·분업론 등에 대한 인식도 미숙하여 체계적이고 진보적인 광업론이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약용의 광업론은 특출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광업론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국영 광업정책의 단서가 마련되는<地理策>·<應旨論農政疏>가 저술된 시기이다. 이 때 정약용은 설점수세제를 기본으로 한 정부의 광업정책을 용인하면서 銅店과 鐵店에 대한 억제정책을 완화시키기를 요구했고, 광업의 민영화를 인정했다.479) 그러나 정약용의 광업개혁론은 광업의 민영화보다는 관영화 또는 국영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정약용의 광업개혁론에 있어서 두 번째 단계는≪경세유표≫·≪목민심서≫의 단계이다. 여기에서 그는 광업정책 및 광업경영론을 논했고, 광업제도의 운영을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중앙정부 차원의 근본적 개혁방안으로 국영 광업정책 및 국영 광업론을 제시했다. 즉 그는 중앙에는 司礦署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監務官을 파견하여 광산을 관리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이용감의 설치를 제안했고, 金鑛軍의 생산·노동조직과 광산의 경영형태 및 생산기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전망했다. 그리고 그는 아전의 중간수탈을 막고 소란의 근원도 방지하기 위해서 지방관 차원의 광업제도 운영방안으로 광업행정 지침을 구상했다.480) 이러한 다산의 국영 광업개혁론은 당시 발달한 덕대제 광업경영의 기술수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자들은 왕도정치의 이념에 따라 상공인을 보호하고, 당시 사회의 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었던 상공업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상공업개혁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들은 상업의 말업관을 거부했다. 그들은 통공발매정책을 지지했고 상업세의 증대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금속화폐의 제조와 유통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긍정적 입장을 취했다. 수공업의 발전에 대해서도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광업을 국부의 원천으로 파악하여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해서는 광산국영이 요청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그들의 상공업개혁론은 현실적으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遊食者를 정리하여 皆職을 성취해야 한다는 사회개혁적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473) | 姜萬吉,<實學者의 商工業 發展論>(≪東洋學國際學術會議論文集≫,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90), 1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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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 | 姜萬吉,<實學者의 商業觀>(≪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高麗大 出版部, 1973), 22∼23쪽. |
475) | 姜萬吉,<丁若鏞의 商工業政策論>(≪朝鮮時代 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243∼252쪽. |
476) | 元裕漢,<實學者의 貨幣經濟論>(≪東方學志≫26, 1981). |
477) | 조선 후기 광업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柳承宙,≪朝鮮時代鑛業史硏究≫(고려대 출판부, 1993) 참조. |
478) | 元裕漢,<朝鮮後期 實學者의 鑛業論 硏究-茶山 丁若鏞의 鑛業國營論을 중심으로>(≪한국근대사회경제사연구≫, 1985). |
479) | 元裕漢, 위와 같음. |
480) | 林炳勳,<茶山 丁若鏞의 國營鑛業政策·經營論-사회개혁사상의 발전 및 사회개혁론 체계와 관련하여->(≪東方學志≫54·55·56합집, 19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