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공간관의 변화
전통적으로 기하학적 인식체계에 익숙하지 못했던 조선의 학자들은 지역의 형태·면적·사물의 분포 등에 대한 정확한 공간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 국토에 관한 사실적·구체적 지식의 탐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중국 중심의 지리적 공간질서와 역학적 우주관에 입각한 天圓地方說에 더 관심이 많아 중국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중국적 윤리가 미치는 몇 겹의 지역이 圈構造를 형성한다고 믿었다.516)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양의 지리학이 유입됨에 따라 중국적 우주관이 서구적 우주관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17세기 초부터 한국지리학사에 나타나기 시작한 서구적 우주관은 李睟光·鄭斗源 등이 북경의 서양신부들로부터 입수한 지리적 정보를 통하여 싹트게 된 것이다.517) 특히 정두원이 도입한 地球儀는 천원지방의 개념을 깨뜨렸을 뿐 아니라 중국 역시 광대한 지구상의 작은 땅에 불과하며 결코 우주의 중심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가 천하의 중심인 중국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땅덩어리이고, 따라서 문화적으로 중국의 아류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적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며, 그 선구자는 星湖와 順菴이었다.518)
성호와 순암이 중국적 천하사상을 부정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은 명이 만주족에게 멸망함으로써 조선인의 尊明中華意識이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이 오랑캐의 지배하에 놓인 이상 중국은 이미「천하의 중심」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인식이 조선의 지식층 사이에서 싹트게 된 것이다.519)
이와 같은 공간인식의 변화에 따라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들은 우리 민족이 정신적으로 중국에 예속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생각은 한반도만의 지리연구와 지도제작의 전통을 수립하는 바탕이 되었다.
516) | Needham, J. and Wang Ling,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3, Cambridge Univ. Press, 1971, pp.50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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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 李睟光은 3차에 걸친 北京使行 때 습득한 세계지리에 관한 정보를≪芝峰類說≫地理部에 기술하였다. 한편 鄭斗源은 인조 9년(1631)에 漢譯 천문·지리서와 천문도를, 그리고 인조 22년에는 지구의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
518) | 李 瀷,≪星湖僿說≫권 2, 天地門 分野. 沈㬂俊,≪順菴 安鼎福 硏究≫(一志社, 1985), 175쪽. |
519) | 李萬烈,<17·8世紀의 史書와 古代史認識>(≪韓國史硏究≫10, 1974), 117∼1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