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지역연구
조선조정은 건국 초부터 외국과의 교류를 억제하는 보수·쇄국정책을 고수했던 바, 이러한 정책은 지역연구를 위축시킨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17세기부터 서양의 지리서가 전래됨에 따라 외국의 지리를 연구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지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 문화의 가치와 전통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풍을 일으킨 선구자는 李睟光이었으며, 그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많으나 대표적인 인물은≪地球典要≫를 편찬한 惠崗(또는 明南樓) 崔漢綺이다.
≪지구전요≫는 국내외의 각종 지리서를 참조하여 편찬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세계지리서로서, 이 책은 인간의 지식과 문명은 견문의 확대를 통해 진보된다는 경험론적 세계관과 인식론을 바탕으로 쓰여졌다.527)
全國地理志와 地方地理志(邑誌)로 구분되는 內國地理志는 선초부터 조정이 중요시한 분야이다. 지리지의 편찬을 중요시한 이유는 그것이 통치의 기초자료가 되는 각종 정보, 즉 각 지방의 인재배출 상황·자연환경·산물·교통사정·인구분포 등을 수집하는데 유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지리지의 특성을 시기별로 보면 초기 이래 전국지리지가 많이 간행된 반면 후기에는 읍지편찬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읍지간행의 배경으로는 왜란으로 각 지방의 사정이 많이 바뀌어 새로운 정보의 수집이 요구되었고,528)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성호학파 학자들이 지역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점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국지리지로는 淸潭 李重煥의≪擇里志≫와 고산자의≪大東地志≫가 있으며, 읍지로는 다수의 관찬읍지와 사찬읍지가 있다.
택리지는 조선시대 지리서 중에 한반도의 지리적 사항을 가장 실증적·체계적으로 파악한 저서이다. 당시의 학자들 대부분이 문헌고증적 방법에 의해 연구를 수행한 반면에 청담은 뛰어난 관찰력을 가지고 답사를 했고 직접 수집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과학적 지리학의 토대를 이룩하였다.529) 그의 저술에서 가장 돋보이는 卜居總論을 보면 이상적인 취락의 입지조건으로 자연환경·농업·교통과 교역·문화 등 여러 가지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可居地의 질을 논했음을 알 수 있다.
고산자는≪東輿圖志≫·≪輿圖備志≫·≪大東地志≫등의 지리서를 저술했는데, 이 중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대동지지≫이다. 이 책은 기존의 지리서에서 볼 수 없는 각 지방의 인구·경지면적·조세·교통 등의 경제·사회문제와 국방문제를 심도있게 취급한 반면에 시문·인물·성씨 등 비지리적 내용은 거의 제외시켜 순수한 지리지의 특성을 살렸다.530)
읍지의 편찬은 조선 후기 지리학 최대의 성과로 꼽힌다. 읍지는 군현의 지리적 사항을 기록한 책이지만 驛誌·鎭營誌 등도 이에 포함된다. 읍지는 편찬자에 따라 관찬읍지와 사찬읍지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영조대부터 순조대까지 수차에 걸쳐 편찬되었고, 후자는 조선 중기부터 영남사림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다.531)
읍지는 다양한 각 지방의 위치·자연·환경·인구·경지면적·세금·교통·상업·군사기지 등의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지방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대동지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서 조선 후기의 읍지에는 사회·경제·군사적 내용은 강화된 반면 인물·시문 등 비지리적 내용은 많이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