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가곡의 성장과정
현행 가곡 한 바탕의 직접적인 모체가 數大葉인데, 이 삭대엽은 역사적으로 中大葉·慢大葉과 관련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만대엽이 주로 연주됐지만,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중대엽과 삭대엽이 서로 비슷하게 성행하였다. 18세기에 전성했던 중대엽은 후반에 이르면서 삭대엽에 의해서 차츰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익이 다음과 같이 언급했듯이 영조 때에는 사람들이 느린 노래보다도 빠른 노래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의 풍속가사에 대엽조가 있는데, 형식이 다 같아서 길고 짧은 구별이 없다. 그 중에 느린 것·중간 것·빠른 것 세 가지 조가 있으니, 이것은 본래 心方曲이라 이름하였다. 만대엽은 너무 느려서 사람들이 싫증을 내어 폐지된 지가 오래고, 중대엽은 조금 빠르나 또한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지금 통용하는 것은 삭대엽이라는 곡조이다(李 瀷,≪星湖僿說≫권 13, 人事門, 國朝樂章).
18세기 중엽부터 중대엽보다 삭대엽이 성행됨에 따라서 삭대엽의 변주곡이 많이 파생하게 됐다. 이제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삭대엽의 옛 모습을 담은 거문고악보를 중심으로 세기별로 개관할 차례이다.
18세기 가곡의 반주음악을 전하는 거문고악보로≪한금신보≫·≪琴譜≫(연세대 소장)·≪漁隱譜≫(숙종 45:1719)·≪유예지≫(≪임원십육지≫소재) 등이 있으며, 가곡의 가사를 집대성한 김천택의≪청구영언≫(영조 4:1728)과 김수장의≪海東歌謠≫가 있다. 이와 같은 고악보와 노래책에 의하면, 18세기 전기의 삭대엽에는 17세기에 나타난 1·2·3의 변주곡 이외에 제4라는 변주곡이 새로 등장함으로써, 가곡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삭대엽에는 弄·樂·編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변주곡이 파생됐는데,≪유예지≫에는 弄葉·羽樂·界樂·編數大葉의 명칭으로 기록됐다.
김천택은 이미 잘 알려진 가객이어서 능히 새 곡을 스스로 지어 부를 수 있었다. 그는 거문고의 대가 김성기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는데, 김성기가 거문고를 연주하면 김천택은 가곡을 불러서 화답하니, 거문고와 노래 소리는 아주 잘 어울려 마치 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金天澤,≪靑丘永言≫序;同影印本, 통문관, 1951, 8쪽).
위의 인용문은 영조 4년 鄭潤卿이 김천택의≪청구영언≫을 위해서 써준 서문의 일부인데, 위의 인용문에서 18세기 초에 가객 김천택과 거문고 대가 김성기는 가곡발전에 크게 공헌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숙종 말 포교를 지낸 사람으로서 敬亭山歌壇의 풍류객들과 어울렸던 김천택은≪청구영언≫에 57수의 작품을 남긴 유명한 가객이었고, 尙衣院의 弓人이었던 김성기는 거문고 이외에 비파와 퉁소에도 능했던 뛰어난 율객이었다.772) 이렇듯 18세기 가곡의 발전은 가단 및 풍류방의 여러 가객과 율객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8세기 가곡의 전통을 전승한 19세기 반주음악은≪三竹琴譜≫·≪玄琴五音通論≫(고종 23:1886)·≪학포금보≫등에 전하고, 가곡의 가사를 담은 安玟瑛과 朴孝寬의≪歌曲源流≫(고종 13)가 있다. 이런 가곡과 관련된 고악보에 의하면, 19세기에 이르러 가곡의 파생곡은 절정을 이루었고, 따라서 현행 가곡의 한 바탕이 모두 형성되기에 이르렀다.≪삼죽금보≫에 의하면 현행 가곡의 頭擧에 해당하는 調臨이 등장했고, 삼수대엽의 파생곡인 騷聳 또는 騷耳가 보이며, 樂계통의 羽樂과 編樂이 파생됐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中擧·平擧·半葉·還界樂·言弄·言編과 같은 새로운 변주곡의 출현은≪현금오음통론≫과≪학포금보≫에서 확인된다.
남자가객에 의해서 연주됐던 男唱가곡이 가곡사의 주된 흐름을 형성했지만,≪女唱歌曲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세기에 이르러 여창가곡이 등장하여 작은 물줄기를 형성했다. 풍류방에서 남녀가객이 차례대로 노래하는 男女唱가곡의 전통은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확립됐다. 왜냐하면 남녀가객이 2중창으로 부르는 태평가가≪가곡원류≫에 歌畢奏臺라는 명칭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많이 성장한 조선 후기 삭대엽의 전통이 현행 남녀창가곡의 뿌리 구실을 했다.
772) | 趙潤濟,≪韓國詩歌史綱≫(乙酉文化社, 1954), 372∼37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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