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가사와 시조의 등장
흔히 十二歌詞로 알려진 가사는 가곡처럼 오랜 역사를 갖지는 않았지만, 삭대엽이 성행했을 18세기 무렵부터 가사가 노래로 불렸음을≪古今歌曲≫·≪청구영언≫·≪南薰太平歌≫와 같은 노래책에 의해서 알 수 있다.≪고금가곡≫에는 竹枝詞·春眠曲·襄陽歌·漁夫詞가 전하고, 白鷗詞·黃鷄歌·군악(길군악)·相思曲·勸酒歌·양양가·處士歌·梅花歌·춘면곡이≪청구영언≫에 전하며,≪남훈태평가≫에는 춘면곡·상사별곡·처사가·매화가·백구사가 전한다.
가사의 악곡을 담은 거문고악보는≪삼죽금보≫인데, 이 고악보에는 상사별곡·춘면곡·길군악(行軍樂)·매화곡·황계곡·권주가, 이상 여섯 곡의 거문고악보가 전한다. 19세기 전기에는 가곡처럼 가사도 거문고반주에 의해서 노래로 불렸음이 분명하고,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歌詞六種≫(1821∼1850) 중 노인가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閑暇한 처사가는 樂民歌로 화답하고,
多情한 상사가는 춘면곡 화답하고,
虛蕩하다 어부사는 매화곡 화답하고,
凄凉한 老姑歌는 花階(黃鷄?)타령 화답하고,
(李惠求,≪韓國藝術總覽≫, 289쪽;李惠求 등≪國樂史≫, 55쪽 재인용).
백구사·죽지사·수양산가·양양가·처사가와 같은 5곡의 가사가 언제부터 노래로 불렸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9세기 후반부터 노래로 불린 듯하다. 왜냐하면 5곡의 가사가≪가사육종≫과 같은 노래책에도 나타나지 않고, 또≪삼죽금보≫와 같은 거문고악보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행 십이가사의 전통은 금세기 초반 가곡의 명인 河圭一(1867∼1937)과 가사의 명인 林基俊(1868∼1940)에 의해서 후대에 전승됐다.
옛 문헌에 時節歌 또는 時節短歌로 적힌 時調가 음악적 용어임은 확실하지만 국문학의 시조와 구분하기 위하여 時調唱이라고 불리고 있다. 초장·중장·종장이라는 3장 형식으로 노래부르는 시조가 영조 무렵에 시작됐다고 하는데, 이런 추측의 근거는 申光洙의≪石北集≫중에 關西樂府에 나오는 가객 李世春이 일반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기록이다.773)
그러나 시조의 선율을 기보한 최초의 악보는 서유구의≪유예지≫와 이규경의≪歐邏鐵絲琴字譜≫이다.774) 이 두 고악보에 전하는 시조보가 현행 京制시조의 기본형으로 알려진 평시조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진 바775) 있으므로 현행 평시조는 19세기 초에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평시조가 서울지방의 풍류방에서 가객들에 의해서 가곡과 함께 널리 유행됨으로써 여러 형태의 변주곡이 파생됐다. 지름시조·사설시조·중허리시조 모두가 평시조에서 파생된 변주곡인데 이것은 마치 가곡의 중거와 두거가 이수대엽에서 파생된 것과 비슷하다. 지름시조는 두거에 해당하고, 중허리시조는 중거와 비교될 수 있으며, 사설시조는 긴 사설을 엮어 부르는 編계통의 가곡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경제시조가 19세기 한양에서 지방에까지 널리 파급됨에 따라서 지방의 가객들에 의하여 지방적 특성을 나타내는 시조형태들이 생기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경상도의 嶺制시조·전라도의 完制시조·충청도의 內浦制시조이다. 현행 시조는 오직 장고반주에 의해서 연주되지만≪구라철사금자보≫에 의하면 19세기 전후 무렵에는 시조의 반주악기로 洋琴이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