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판소리의 역사적 발전
판소리는 조선음악사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성악의 한 갈래인데,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판소리는 숙종 무렵부터 유래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추정의 근거는 柳振漢(1711∼1791)의≪晩華集≫에 전하는 한문시 200구의 춘향가 사설이다.≪만화집≫이외의 판소리사연구에서 중요한 문헌자료로는 宋晩載의<觀優戲>776)·<八道才人等狀>·申緯의<觀劇詩>·신재효의<廣大歌>등이 있다.
장안에 우춘대가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당대에 누가 과연 후계자가 될 것인가.
한바탕 소리를 잘 하면 많은 비단을 받는데,
권삼득과 모흥갑이 아직도 어리구나.
송만재의<관우희>에서 뽑은 위의 인용문은 禹春大가 일찍부터 판소리명창으로 활약했음을 보여주는 음악사료이다. 우춘대가 철종 때의 李參鉉의≪二官雜志≫에서는 虞春大로 기록됐지만777) 같은 사람임에 틀림없고 그는 權三得이나 牟興甲보다 한 세대의 선배였다. 따라서 우춘대는 河漢潭 및 崔先達과 함께 정조 무렵부터 판소리명창으로 활동했다. 판소리 열두 마당이 서유구의 사촌처남인 송만재의<관우희>에서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19세기 전후에 이미 성립됐음이 확실하다.<관우희>에 나오는 판소리 열두 마당은 춘향가·심청가·박타령(興甫歌)·토끼타령·화용도(赤壁歌)·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강릉매화전으로 밝혀졌다.778)
우춘대보다 한 세대 아래의 권삼득과 모흥갑은 순조 무렵부터 판소리명창의 대열에 참여했음이 순조 27년(1827)의<팔도재인등장>에 나온다. 권삼득·모흥갑과 동년배인 宋興祿·金啓喆·高壽寬·廉季良과 같은 명창들이<팔도재인등장>779) 및 신위의<관극시>780)에 언급됐다. 이러한 판소리명창들이 신재효의<광대가>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우리 나라 명창광대, 자고로 많거니와,
기왕은 물론하고, 근래 명창 누구누구.
명성이 자자하여, 사람마다 칭찬하니,
이러한 명창들을, 문장으로 비길진대,
송선달 興祿이는, 唾成珠玉 傍若無人,
花爛春城 萬花方暢, 詩中天子 李太白.
牟同知 興甲이는, 關山月色 草木蟲聲,
淸天萬里 鶴의 울음, 詩中聖人 杜子美.
권생원 士仁씨는, 천층절벽 불끈 솟아,
萬丈瀑布 월렁꿜꿜, 文起八代 韓退之.
신선달 萬葉이는, 九天銀河 떨어진다.
明月白露 맑은 기운, 醉過楊州 杜牧之.
황동지 海淸이는, 적막공산 밝은 달에,
다정하게 雄唱雌和, 杜宇啼月 孟東野.
고동지 壽寬이는, 同我婦子 饁彼南畝,
은근문답 하는 거둥, 勸課農桑 白樂天.
김선달 啓哲이는, 담탕한 山川靈氣,
명랑한 山河影子, 遷雲明月 歐陽修.
송낭청 光祿이는, 망망한 長天碧海,
건일 때가 없었으니, 萬里風帆 王摩詰.
주낭청 德基는, 遁甲藏身 무수변화,
농락하는 그 수단이, 신출귀몰 蘇東坡.
이러한 광대들이, 다 각기 所長으로,
擅命을 하였으나, 각색구비 명창광대,
어디 가 얻어보리. 이 속을 알 것만은,
알고도 못 행하니, 어찌 아니 답답하리.
(≪申在孝판소리全集≫, 연세대 출판부, 1971)
위에서 보이듯이, 중국의 시인과 비교된 판소리명창들은 李白(701∼762)에 송흥록, 杜甫(712∼770)에 모흥갑, 韓愈(768∼824)에 權士仁, 杜牧(803∼852)에 申萬葉, 孟郊(751∼814)에 黃海淸, 白居易(772∼831)에 고수관, 歐陽修(1007∼1072)에 김계철, 王維(669∼759)에 宋光祿, 蘇東坡(1036∼1072)에 朱德基 등 9명이다. 이 9명의 판소리명창들은 신재효가 생존하였을 때 활약했음이 분명한 이상, 그들은 19세기 전반부터 명성을 얻었으며 또 후세에 자신들의 음악적 특징을 나타내는 더늠을 남겨 주었다.
권삼득의 더늠은 흥보가 중 제비가에 전하는데, 그는 설렁제라는 독특한 가락을 만든 명창으로 유명하다. 평양감사 앞에서 노래부른 명창으로 유명한 모흥갑의 연주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고(<그림>),781) 그의 더늠은 춘향가 중 이별가에 전한다. 경기도 여주출신의 염계달은 경드름이라는 독특한 가락에 뛰어났으며, 그의 더늠은 춘향가 중 十杖歌에 전한다. 추천목에 뛰어난 고수관의 더늠은 춘향가 중 자진사랑가에 전하며, 석화제를 잘 불러 유명한 김계철의 더늠은 심청가 중 심청이 태어나는 대목에 전한다. 판소리의 중시조 또는 歌王 송흥록은 진양장단을 완성시켰고, 또 판소리의 羽調와 界面調를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킨 명창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귀신이 우는 듯한 슬픈 소리의 鬼哭聲을 잘 냈던 명창으로도 유명하다.
19세기 전후에 성립된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서 오직 춘향가·퇴별가·심청가·박흥보가·적벽가·변강쇠가 등 여섯 마당만이 신재효에 의해서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이 여섯 마당 중에서 변강쇠가만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라졌으며, 나머지 다섯 마당은 판소리명창들에 의해서 금세기까지 전승됐고 현재에도 연주되고 있다. 이렇듯 판소리사에서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인물 신재효는 다음과 같이 廣大歌에서 판소리의 이론을 확실히 제시했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辭說치레, 그 之次 得音이요,
그직차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귀성 끼고 맵시 있고, 頃刻의 천태만상
爲仙爲鬼 千變萬化, 좌상의 풍류호걸
귀경하는 노소남녀,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五音을 분별하고,
六律을 변화하야, 五臟에서 나는 소리,
弄樂하여 자아낼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사설이라 하는 것은, 精金美玉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錦上添花,
七寶丹粧 美婦人이, 병풍 뒤에 나서는 듯,
三五夜 밝은 달이, 구름 밖에 나오는 듯
새눈 뜨고 웃게 하기, 대단히 어렵구나.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元元한 이 속판이, 소리하는 法例로다.
판소리 광대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요건으로 신재효는 인물·辭說·得音·너름새 이상 네 가지를 규정하고 그것을 비유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판소리 광대의 네 가지 기본요건 중에서도 신재효는 첫째로 인물을 꼽았고, 좋은 목소리로 장단과 가락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득음을 둘째로 쳤으며, 셋째로는 정확한 아니리로 이야기를 엮어갈 수 있는 사설의 중요성을 언급했고, 넷째로 구성지고 맵시있는 발림으로 청중을 사로잡아야 하는 너름새를 지적했다. 19세기 중엽에 확립된 신재효의 판소리이론은 현재에도 통용되기 때문에, 판소리발달사에서 매우 중요시되어야 마땅하다.
신재효가 판소리사에서 종요시되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남긴 여섯 마당의 판소리사설 및 광대가의 판소리이론 이외에도 많은 단가를 남겼기 때문이다. 새로 창작한 단가는 成造歌·烏蟾歌·광대가·湖南歌·勸遊歌·治山歌·虛頭歌·漁夫辭·桃李花歌·短雜歌·葛處士十步歌·明堂祝願·방아타령이며, 그는 또 大觀江山·歷代歌·蕭上八景·皐皐天邊 등 13편의 판소리 단가를 수집하여 남겼다.782)
19세기 전반부터 판소리명창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함으로 인하여, 특히 전라도를 중심으로 지역에 따르는 판소리의 유파가 생겨났다. 東便制·西便制·中高制가 판소리유파의 용어인데, 모두를 싸잡아서 대가닥이라고 불렀다.783) 羽調를 많이 사용하여 씩씩하고 웅장한 가락의 맛을 특징으로 삼았던 동편제 판소리는 섬진강 동쪽지방에 있는 구례·운봉·순창출신의 명창에 의해서 발전됐는데, 송흥록을 동편제의 시조로 삼는다. 섬진강 서쪽의 광주·나주·보성출신의 명창들이 발전시킨 서편제 판소리의 가락은 界面調를 많이 써서 정교하고 감칠맛을 풍기는데, 朴裕全이 서편제의 시조로 꼽힌다. 책 읽듯이 덤덤한 맛으로 노래 부르는 중고제는 경기도와 충청도출신의 명창들이 발전시킨 유파인데, 염계달을 시조로 친다.784)
19세기 후반을 거치는 동안에 판소리 다섯 마당의 사설이 내용적으로 유교이념을 잘 나타냈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부모에 효도를 강조한 심청가, 부부 사이의 정절을 강조한 춘향가, 임금에게 충성을 나타낸 수궁가(퇴별가 또는 토끼타령), 친구 사이의 의리를 중요시한 적벽가(화용도), 그리고 형제간의 우애를 보여준 흥보가(박타령)의 사설들은 삼강오륜의 유교이념에 적합했기 때문에, 판소리 다섯 마당이 조선 후기 사회에서 오래도록 환영받았다.
천민출신이 아닌 常民의 한량들 중에서 나온 비가비 또는 양반광대는 19세기 판소리의 발달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양반 못지 않은 학식을 지녔던 비가비들은 판소리의 한글사설에 세련된 한문구를 넣어서 다듬었기 때문이다. 권삼득은 향반출신의 비가비로 대표적인 명창이고,785) 한문에 깊은 조예을 가졌고 진사에 등과했던 鄭春風도 전형적인 비가비로 꼽히며,786) 판소리이론에 밝았던 신재효도 양반광대의 범주에 든다. 이외에 徐成寬·金道先·安益花도 비가비로 활약했던 판소리명창들이었다.787)
고종 무렵에 활약했던 판소리명창들은 朴萬順·宋雨龍·金世宗·정춘풍·張子伯·李捺致·丁昌業·金正根·韓松鶴 등이었다. 이들 중에서 박만순·송우룡·김세종·장자백은 동편제 판소리를 전승했고, 이날치와 정창업은 서편제를 이어받았으며, 김정근과 한송학은 중고제를 발전시켰다. 이들도 19세기 전반기와 중반기의 명창들처럼 새 더늠을 만들었다. 춘향가를 잘 불러 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박만순의 더늠은 춘향가 중 夢遊歌에 전하고, 서편제를 이어받은 정창업의 더늠은 심청가 중 夢恩寺 化主僧이 내려오는 대목에 전하며, 신재효의 제자로 판소리이론에 밝았던 김세종의 더늠은 춘향가 중 천자뒤풀이에 전한다. 새타령에 독보적인 명창 이날치의 더늠은 춘향가 중 自歎歌에 전하고, 적벽가에 뛰어난 비가비 정춘풍의 더늠은 단가 소상팔경에 전하며, 김세종의 문하에서 자란 장자백의 더늠은 춘향가 중 赤城歌에 전한다.
판소리전통 중에 ‘一鼓手二名唱’ 또는 ‘숫고수 암명창’이라는 말이 전하듯이,788) 판소리명창의 북반주를 맡아 적절한 추임새를 구사하던 고수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수출신의 명창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송광록과 주덕기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송흥록의 아우 송광록은 형의 고수로 활약하다가 나중에 명창으로 대성한 사람이고, 주덕기 역시 고수출신의 명창이다. 고수의 이러한 전통이 20세기에 이르러 韓成俊 같은 전문적인 고수로 이어졌다.
776) | <觀優戲>는 표지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문헌으로, 申緯의<小樂府>가 같이 수록되어 있으며 연세대학교 도서관 濯斯文庫本이다. 원문은 李惠求,≪韓國音樂硏究≫(국민음악연구회, 1957), 352∼353쪽(大意) 및 363쪽이고, 번역은 張師勛,≪韓國音樂史≫(정음사, 1976), 322쪽에서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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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 | 金東旭,≪春香傳硏究≫(연세대 출판부, 1965), 37쪽. |
778) | 李惠求,<宋晩載의 觀優戲>(≪韓國音樂硏究≫, 1957), 317∼364쪽. |
779) | 李惠求, 위의 글, 356쪽. 朴憲鳳,≪唱樂大綱≫(한국국악예술학교, 1966), 53∼56쪽. |
780) | 鄭魯湜,≪朝鮮唱劇史≫(朝鮮日報社, 1940), 6쪽. |
781) | 宋芳松, 앞의 책(1984), 사진 26(서울대 박물관 소장 명창 모흥갑의 판소리연주도) 참조. |
782) | 姜漢永,<판소리에 불사른 人生>(≪韓國의 人間像≫5, 신구문화사, 1966), 386∼399쪽. ―――,<申在孝의 판소리사설 硏究>(≪申在孝판소리全集≫, 연세대 출판부, 1969), 1∼29쪽. |
783) | 鄭魯湜, 앞의 책, 10∼11쪽. |
784) | 李輔亨,<판소리의 제(派)에 대한 硏究>(≪韓國音樂學論文集≫,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61∼104쪽. ―――,≪판소리다섯마당≫(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82), 8∼11쪽. |
785) | 鄭魯湜, 앞의 책, 18쪽. |
786) | 鄭魯湜, 위의 책, 74쪽. |
787) | 鄭魯湜, 위의 책, 102∼103쪽. |
788) | 鄭魯湜, 위의 책, 25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