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통치조직의 변혁과정
통감부시대에는 甲午·乙未 양 개혁을 통하여 이루어진 조선왕조 전래의 통치조직에 다시 크게 수술을 가하여 정비하여 갔다. 통감통치 초기에는 韓日協約과 顧問·參與官을 통하여 한국정부를 조종하였으나 급격한 관제개정은 삼갔다.472)
宮內府:甲午改革에서 일본제도를 모방하여 궁내부를 설치한 후 여러 차례의 관제개정이 있었으나 한국 고래의 궁중제도의 인습이 저들의 침략에 큰 장애가 됨을 깨닫고 1906년 7월에 顧問警察이 궁중을 경위하고 宮禁令을 제정·공포하는 등 신중한 궁중숙청작업에 착수하였다. 실제로 한국 고래의 궁중인습은 해가 갈수록 혼란과 병폐의 근원이 되어 왔는데, 그 대표적 예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궁중에서 大臣으로부터 지방군수나 그 이하의 말단관리에 이르기까지 그 任免과 상벌을 좌우하였으며 卑官微職의 진퇴도 군주가 친히 명령하거나 군주의 직접명령이란 구실하에 궁중의 권세가가 자의로 좌우했다. 따라서 정부 대소의 관리는 오로지 궁중에 영합하여 무사안일하게 자기의 지위를 지키는 데 급급하였고 정부는 점점 궁중권세에 예속되어 갔다.
② 재정상 궁중은 국가 이외의 별개의 徵稅主體가 되어 궁중에서 징세관을 파견하여 각종의 雜稅를 징수하고 무명의 부과를 강요하고 은연히 國庫에 대립하는 지위를 점했다. 그리고 황실에 관련된 新費目이 있을 때마다 황실비 정액 외로 국고에 요구하거나 또는 국고의 부채로 하여 장래에 환수토록 하였다. 또는 度支部大臣에게 명령하여 인민에게 租稅受領書를 매도하여 이를 매수하는 사람에게 장래의 국고수입에서 직접 결제토록 하는 소위 外劃制度를 국고에 강제하기도 하였다. 국고수입의 세원인 세종을 궁내부로 이관하기도 하고 혹은 營業免許나 特許를 처분하여 手數料·免許料를 인민으로부터 징수하기도 하였다.
③ 궁중은 외국인과 각종의 계약을 체결하여 그 이행에 따르는 의무는 정부에게 일임하였다.
④ 궁중이 特赦를 남용하여 재판의 결과를 무효화하였다.
⑤ 궁중은 정부 각 部局의 행정에 간섭하고 또는 정부에 대신해서 직접 행정권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⑥ 궁중에 무용의 冗官冗員이 많아 皇室費를 낭비하고 군주의 측근에서 국정을 좌우하던 폐단이 있었다.
통감부는 이러한 궁중인습을 숙청한다는 구실하에 1906년 7월부터 警務顧問으로 하여금 일본경찰관을 궁중 각 문에 배치하여 감시하는 동시에 궁중에 일본세력을 부식하였으며 동년 7월 7일 궁금령을 공포하여 일정한 관직자 이외의 궁중출입을 금지하고 그 출입의 경우도 고문경찰이 발급하는 門票의 소지자에 한하여 허가하도록 하였다. 이 궁금령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고 있는 抗日愛國志士들의 궁중출입을 통제하고 궁정세력의 정치관여를 배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 궁금령의 주요내용은, i) 궁전의 출입은 궁내부대신의 감독에 속하고 궁전은 侍從院卿, 궁문은 主殿院卿이 각기 관장할 것, ii) 궁전·궁문의 출입에는 문표를 사용할 것, iii) 議政 이하 各大臣, 中樞院議長·副議長, 侍從武官長 및 召命을 받은 元老·大臣·特進官·承候官은 궁전출입에 문표가 필요없으며 또한 현직군인·경찰관으로서 제복착용자는 궁문문표가 필요없다. iv) 궁중으로부터 물건을 반출하는 데는 物件票를 사용할 것 등이다.473)
中樞院:중추원은 한국 고래의 제도로서 조선조에서는 中樞府라고 칭하였다. ‘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약 9개월 전인 1905년 2월에 공포된 官制 중 중추원의 編制는 다음과 같다.
중추원은 황제를 보필하는 最高諮詢機關으로서 議長 1인(親任), 副議長 1인(勅任), 贊議 8인(칙임), 副贊議 15인(奏任), 參事官 또는 書記官 3인(주임), 主事 4인(判任)으로 구성되며 漢城에서 2인, 道에서 각 1인씩 才識있고 民望있는 자로 선임하였다. 그 審査議政事項으로는 i) 의정부로부터 諮詢한 軍國 주요사항과 법률·칙령의 제정 및 개폐에 관한 사항, ii) 법률·칙령의 실행효과와 그 미비사항에 대한 건의사항(이 중 副贊議는 漢城府尹 및 각도 觀察使가 2인 혹은 3인을 추천하면 議政大臣이 의장·부의장과 협상한 후에 천거·상주하여 재가를 얻는다). iii) 법률·칙령실시에 관한 건의사항, iv) 人民獻議에 관한 사항 등을 들 수 있다.474)
중추원의 운영방법을 살펴보면 의장과 찬의가 위의 의정사항에 대하여 가부의결 한 후 이를 의정부에 조회 또는 설명하여 만일 의정부와 중추원이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하는 경우는 국무대신이 중추원에 참석하여(부하관리를 대리참석 시킬 수 있음) 의안취지를 변명하도록 하였다. 또한 중추원에 고문 6인을 두되 1년 이상 정부대신의 親任職을 지낸 자 중에서 임명하고 다른 관직을 겸할 수 없게 하였으며 의정부로부터 자순한 군국 중요사항은 의장이 고문을 회동시켜 收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밖에 중추원회의는 내각회의와 같이 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치 않으면 개회할 수 없었고 또한 다수결로 의결했다.475) 이와 같이 중추원의 조직과 기능은 왕조 말엽의 獨立協會運動의 일환으로 생긴 중추원 즉 입헌군주체제하에서의 의원내각제의 국회조직을 모방한 것을 변혁하여 답습한 것으로 어느 정도의 민주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476)
내각제도:1907년 6월의 내각관제(칙령 제35호)로 종전의 의정부는 내각으로, 의정부대신은 내각총리대신으로 개칭되었으며 개정된 관제하에서는 중추원제를 형식적 기구에 불과하나 그대로 존속시키고 있는 동시에 國務大臣(내각총리대신 및 행정각부대신)은 황제를 보필하고 국정을 처리할 책임을 지며 법률·칙령은 모두 내각총리대신 및 관계 대신이 副署하게 하였다.
내각회의를 거쳐야 할 사항은 i) 법률안·칙령안, ii) 예산안·결산안, iii) 예산외 지출, iv) 각부간 主管권한의 쟁의, v) 문무칙임관·주임관의 任命進退, vi) 敍品 및 敍勳, vii) 大赦 및 特赦 등이다. 그밖에 내각총리대신은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나 내각회의를 소집할 수 있고 閣議는 비밀히 하였고 각 대신 3분의 2 이상이 합석치 않으면 개회할 수 없었다. 또한 각의의 의결은 多數可決制에 따랐으며 가부 동수인 경우에는 내각총리대신이 결정했다(내각회의규정 칙령 제37호). 그리고 각부 官制通則을 개정하여 協辦을 차관, 참사관을 서기관, 주사를 書記郞이라 개칭하였다.
지방제도:1906년 5월 한국정부는 한일 양국 관리 수명을 지방제도조사위원으로 임명하여 이들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동년 9월 28일 지방제도개혁에 관한 새로운 관제 및 부수의 칙령을 공포하여 10월 1일부터 실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77)
우선 지방행정구역 및 그 명칭에 관해 보면 한말(1896)에 한성부외에 전국을 13道·1牧·3府·364郡으로 구분하여 제주도에 목을, 廣州·江華·開城에 부를 설치하고 기타는 군으로 호칭했던 것을478) 개정해 개항시장 소재지의 군을 부로, 기타를 모두 군으로 했다. 즉 仁川·沃溝(群山)·務安(木浦)·昌原(馬山)·東萊(釜山)·德源(元山)·城津·三和(鎭南浦)·慶興(두만강 하류 러시아와의 국경)·義州·龍川(압록강 하류 淸과의 국경) 등 11부를 새로 설치하고 다만 개항시장 소재지 중 평양만은 군으로 했다. 그 결과 지방행정구획은 13도·11부·333군이 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인 집주지역만을 ‘府’로서 특별한 지역으로 획정한 점이다.
또한 지방관청 중 각 개항시장에 설치된 監理署 및 濟州牧使廳을 폐지하고 감리의 사무는 부윤에, 제주목사의 사무는 전라남도 관찰사에 인계시켜 제주도에는 단지 郡衙만 설치하였으며 또 평양에는 부를 설치하지 않아 감리의 사무는 평안남도 관찰사에 인계시켰다.
한편 종래의 지방정치·행정의 각종의 폐습을 개혁한다는 구실하에 지방행정에 일본세력을 부식하는 지방관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종래에는 지방행정문란의 원인이 되고 있는 i) 매관매직 행위, ii) 중앙정부의 政令이 지방에 통달하지 않고 지방관리는 오히려 중앙의 권세가에만 영합하는 데 급급한 폐단, 즉 중앙정부가 관찰사·군수에 대해 감독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지방관리는 法規와 訓令 등을 경시하는 폐단, iii) 관찰사가 지방행정을 통괄하는 동시에 재판권도 가지고 있으며 군수 역시 어느 범위의 재판을 하는 데서 사법행정의 혼돈이 초래되고 있는 점, iv) 租稅에 법적 근거가 없어 지방관리가 조세 등의 명의로 국민의 재산을 횡탈하며 재판과 경찰을 그 수족으로 이용하는 폐단, v) 지방관리의 급여가 없거나 빈약해서 부정부패를 유혹하는 폐단, vi) 기타 국민의 권리의식이 약해 관리의 불법월권을 고발하지 못하고 이를 불가항력으로 알고 복종하는 폐습 등이 있었으나 개정된 지방관제에서는 다음과 같은 개혁을 시도하였다.
① 道관찰사의 관장사무를 열거하였다.
② 內部·度支部 양 대신에게 소정의 지방세 부과권을 인정하고 관찰사에게 행정명령을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종래 부윤·군수의 권한 중 부령·군령 발포의 권한과 국세징수·지방재정·사법에 관한 권한 등을 박탈하는 동시에 警務에 관해서도 군수의 관여를 배제하는 등 각급 지방관의 권한에 크게 제한을 가했다. 이것은 중앙집권화의 강화를 기도한 것으로 획기적인 개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도에는 관찰사 외에 새로 參書官·警務官 및 통역관을, 부에는 부윤 외에 새로 참서관·통역관을 일본인 또는 친일분자로 충원하였다. 동시에 부·군의 鄕長479) 및 巡校는 폐지하고 관찰사의 직급을 격하시켜서 勅任二等 이하로 한정했는데 이것은 종래 중앙의 大臣들이 관찰사로 나가 중앙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폐단을 막고자 한 것이다.
③ 종래 단순한 하나의 행정구역에 불과했던 面을 군 밑의 최하급 행정관청으로 하고 종래 面民의 公選 내지 長老의 추천에 의한 면장의 임용제나 자치적인 面會를 폐지하고 군수가 면장을 임명하여 官治行政의 말단기관으로 하였다. 면장은 군수·경찰서·일본군헌병대·수비대 등의 명을 받고 법령의 주지 홍보, 징수금의 납입고지, 징수독려, 土地家屋證明規則에 의한 인증, 民籍의 이동보고, 제 청원서류의 進達, 面內 情況報告, 통계자료의 조사, 洞長의 감독 등에 종사하였다.480)
④ 외국 및 외국인에 관한 사무는 관찰사로 하여금 취급케 하고 부윤은 관찰사의 위임을 받고 이를 취급하며 관계군수를 지휘할 수 있게 하였다.
⑤ 통감은 내부대신으로 하여금 외국 및 외국인에 관한 사항으로서 긴급을 요하거나 또는 사태가 중대한 것은 직접 관계 관찰사·부윤 또는 군수에게 지휘·명령할 수 있게 하고 그 집행결과를 소관 부·군에 보고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훈령을 발표할 수 있게 했다.
한편 내부에 參與官(일본인)을 두고 오로지 지방행정의 감독을 담당케 할뿐더러 각 觀察府 소재지에 理事廳 또는 支廳을 설치하여 일본측 理事官 또는 副理事官으로 하여금 地方政務의 개선에 관하여 보조·감시케 하였다.
지방관의 銓考規程 및 동 세칙을 제정하여 지방관으로 소정의 자격을 정하고 임용에는 전고위원의 조사를 거쳐 시험을 실시하였다(단 지방관 전고규정은 1907년 6월 폐지됨). 관찰사 이하의 급여는 모두 중앙관리와 같게 하고 내부대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관찰사·부윤 및 군수에게는 교제비를 지급하였으며 동시에 지방관아의 경비를 증액하였다. 또한 재판제도를 개정하여 司法·行政分立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또 管稅官官制를 제정하여 징세사무를 지방관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단서를 마련하였다.
이상 일련의 지방제도의 변경은 일본군의 점령하에서 실시되어 의병투쟁 ‘토벌’과 합방추진공작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기초적 작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이 사실은 당시 임명된 군수나 면장에 무뢰한의 친일분자가 많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 472) | ≪韓國施政年報≫, 明治 39·49년, 34∼35쪽. |
|---|---|
| 473) | 위의 책, 66∼68쪽. |
| 474) | 위의 책, 41∼42쪽 ≪法提摘要≫ 1905년 11월, 244∼246쪽 中樞院官制, 1905년 3월 1일자 勅令 제5호·제12호(度支部大臣官房 編,≪現行韓國法典≫, 113∼120쪽). |
| 475) | 金雲泰,≪全訂新版 朝鮮王朝行政史≫ 近代篇(一潮閣, 1984), 366쪽. |
| 476) | 中樞院議事規則 제3호·제15호, 1906년 8월 6일, 議政府令 제1호(≪現行韓國法典≫, 116∼120쪽). |
| 477) | 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서울신문사출판국, 1946), 52∼55쪽. |
| 478) | 한말의 지방행정구역은 빈번한 변혁이 있었다. 주요한 것으로 을미년(1895. 5. 26)에 道制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와 336군으로 개혁했다가(金雲泰, 앞의 책, 309쪽), 다음해 8월에 대한제국하에서 倭色을 일소하기 위해 朴定陽 내부대신의 주도하에 또다시 23부제를 13도제로 개정하고 329개 부·군과 4,332개 면으로 개편했다. |
| 479) | 1896년의 개혁에서 종래의 鄕廳을 폐지하고 그 대신 부윤·군수의 보좌역으로 ‘鄕長’을 두게 하였다. 향장은 향청의 座首·別監 가운데 7년 이상 거주자로서 덕망 있는 자를 군수가 추천하여 군민의 투표에서 최고득점자를 선임했다. 향장은 오로지 稅務를 담당하였고 군수와 지방민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기관이었다. |
| 480) | 朝鮮總督府,<朝鮮地方制度ノ沿革>(≪齋藤實文書≫49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