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1)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1920년대의 의열투쟁을 김원봉과 의열단이 대표했다면, 1930년대의 의열투쟁은 金九와 韓人愛國團이 대표했다. 그만큼 두 사람과 두 단체는 의열투쟁사에서 쌍벽을 이루는 존재였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만주사변 발발 이후 독립운동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특별대책을 세우는 가운데 ‘특무대’의 설치와 암살파괴공작의 추진을 의결하면서 성립되었다.730) 이에 관한 모든 일의 계획과 실행은 임시정부 재무부장 김구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었고, 그가 새 특무조직의 명칭을 한인애국단으로 정하였다.731) 요컨대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의 특명에 의해 임시정부 직할로 성립한 의열투쟁단체였다.
극비의 점조직으로 구성·운영되었기 때문에 전체 단원 규모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으나 80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732) 10여 명의 핵심 단원 가운데 安恭根이 김구를 곁에서 늘 보좌했다. 한인애국단장으로서 김구는 1931년 말부터 이듬해 5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의 특공거사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그 거사 현장은 각각 일본(동경)·중국(상해)·만주(대련)·국내(서울)로 잡혀 있었으며, 나아가 이는 웅대한 구상이요 주도면밀한 계힉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