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의열투쟁
1930년 상해에서 건립된 韓國獨立黨은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당책의 하나로 내걸고 의열투쟁의 실행에도 역점을 두려 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독립당 특무대원 겸 병인의용대원인 康秉學은 1934년 3월 3일 상해전쟁시의 일본군 전몰자 초혼식이 열리고 있는 홍구공원 神社에 폭탄을 던졌다.749) 폭탄의 불발로 인해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불퇴전의 항일투지를 재차 과시한 제2의 홍구공원 의거인 것이었다.
1935년에 창건된 民族革命黨은 “반동분자 및 일·만 요인의 암살과 철도·관공서 파괴 공작”을 수행할 특무부를 두었으며, 수차에 걸쳐 수십 명의 부원들을 화북과 만주로 밀파하였다.750) 또한 서기장 김원봉과 훈련부장 尹世冑는 상해의 번화가 세 곳에 폭발사건을 일으켜 중국인의 배일시위를 촉발할 목적으로 1936년 8월에 당원 2명에게 폭탄 제조를 지시했는데, 제조 중인 폭탄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거사는 실행치 못하였다.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