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世宗大王과 그 偉業
太宗의 아들로 그 位를 傳受한 분이 곧 世宗大王(第四代)이니 大王은 우리 歷史上에서 뿐만 아니라 온 世界 人類史上에 드물게 보는 偉人이었다.
【大王의 性行】 天性이 어질고 부지런하고 學問을 좋아하고 趣味와 才藝가 多方面에 걸쳐 通치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日常生活은-政事를 보살피는 餘暇에 讀書와 思索에 잠기어 머리쓰기를 쉬지 아니하였으나 쓸데없는 일과 생각은 하지 아니 하였다. 또 大王은 意志가 굳어서 自己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떠한 反對가 있더라도 기어코 實行하고 말았다. 大王은 널리 民族을 사랑하고 特히 國民의 간고(艱苦)한 生活에 깊은 同情을 가져 人民을 本位로 한 王道의 治, 愛恤(휼)의 治를 하였지만 自身이 항상 深宮에 處하여 백성들의 간고를 잘 아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一生 동안에 여러 가지 有益하고 빛난 事業을 일우어 기리 後世에까지 그 福音을 내려주셨다.
【大王의 事業】 訓民正音이란 우리의 國文字를 製定하여 (二十五年에 製定하여 二十八年에 반포함) 약간의 완고한 신하들의 反對를 물리치고 實行에 힘쓰심과 같은 것은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다. 【訓民正音】 더욱 그 動機가 이때껏 우리의 글이 없음과 智識 階級에 行하는 漢文은 一般民衆에게 널리 쓰이지 아니하는 까닭에 누구나 쉽게 알아야할 글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그 얼마나 거룩하고 어진 생각이었는가, 文字의 發明 그것보다도 그 民族을 사랑하고 民衆을 애닯히 여기신 그 마음고토리가 거룩한 것이었다. 이 國文 製作에는 물론 大王의 創意가 많이 加하여 있지만 또한 大王의 手足이라할 만한 集賢殿 學士 특히 成三問, 崔恒, 申叔舟 等의 도움도 많았던 것이다.
【集賢殿과 編纂】 集賢殿은 闕內에 둔 一種의 學問硏究所로서 國內의 優秀한 學者들을 모아 날마다 함께 學問을 討論하며 또 여러 가지 有益한 書籍을 編纂하였으니 其中에 高麗史·農事直說·五禮儀·八道地理志·三綱行實·治平要覽·龍飛御天歌·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 및 醫方類聚와 같은 책들은 더욱 著名한 것이었다. 大王은 신하를 부리되 그 재조와 바탕에 따라 適當한 자리에 適當한 사람을 써서 일을 맡겼으니 例를 들면 鄭摠 等은 天文을 硏究케 하고 蔣英實은 大小時計를 만들(製作)게 하고 朴堧(연)으로는 音樂을 整理케 하고 成三問 申叔舟 等으로는 語學과 音韻 等을 硏究케 하였다. 朴堧의 整理한 音樂은 즉 東洋의 最古樂인 雅樂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演奏가 昌德宮 雅樂部에 依하여 傳하고 있다.
【測雨器】 大王의 業蹟中에 또 한 가지 獨創的 發明의 것은 즉 二十四年(國紀 3775 西紀 1442)에 銅으로 測雨器를 만들어 中央과 各 地方의 雨量 分布를 測定케 한 것이니 測雨器의 發明은 西洋보다 앞서기 二百 餘年 前이였다.
佛敎에 對하여는 初年에 역시 抑壓策을 써서 諸宗派를 禪·敎 兩宗으로 統合하고 寺刹를 많이 줄이더니, 【內佛堂과 佛書飜譯】 晩年에는 好佛의 主로 化하여 모든 儒臣들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혹은 闕內에 內佛堂을 이룩하고 혹은 佛書를 飜譯하여 그 方面 文化에도 큰 業蹟을 남기었다. 각종 書籍을 만드는 한편 活字와 印刷術에도 여러 차례 改良을 加하여 前日보다 一段의 進步를 보였다.
大王은 內治 뿐만 아니라 外治에 있어서도 光輝있는 功蹟을 남기었지만 이에 關하여는 後節에 말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