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近世의 中期(國紀 3901年-4057年 宣祖元年-景宗末年)第二章 倭亂과 李舜臣

一. 壬辰 以前의 倭變

앞서 世宗 때에 三浦를 開港한 以後로 倭人의 居留者가 날로 불어 本國人과 서껴 살게 되고 그리하여 그 사이에 간혹 衝突도 일어나며 또 그곳 官吏로 居留倭人을 多少 壓迫한 일도 있었다.

【三浦의 倭亂】 中宗 五年 庚午에는 三浦의 倭人이 釜山僉使 李友曾에 對한 不平으로 드디어 對馬島 倭人의 도움을 얻어 變亂을 일으키어 友曾을 죽이고 三浦를 소란케 하매 朝廷에서 將兵을 보내어 이를 鎭壓하였다. 亂後 朝廷은 三浦를 閉鎖하고 倭人과의 交通을 끊으니 對馬島는 또다시 物資의 困難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島主는 日本 幕府(室町幕府)에 請하여 朝鮮과의 交通을 交涉하였다. 【壬申約條】 朝鮮은 이 애걸(哀乞)과 간청(懇請)에 못 이기어 同王 七年(壬申)에 島主와 소위 「壬申約條」란 것을 맺고 從前의 歲遣船 數와 歲賜米豆의 數를 半減하고 三浦 中에서 단지 薺浦만을 열기도 하였다. (그 후 또 薺浦에서 倭人과 本國人과의 사이에 衝突이 일어나 그들의 居留 貿易港을 釜山으로 옴기었다)

다음 明宗 때에도 여러 번 倭變이 있어 朝廷은 그들의 活刺한 動作과 거기 對한 防備에 多少 注意는 일이키었으나 確乎한 큰 對策은 강구치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오랜 太平 속에서 國家의 機構가 解弛하여지고 上下의 人心이 緊張力을 잃었던 까닭이다. 【李滉·李珥의 提言】 李滉(退溪)·李珥(栗谷)와 같은 名儒는 이때 倭人의 動向 뿐만 아니라 北方 胡人의 그것도 아울러 憂慮하여 國防과 軍備의 充實을 提言하였으나 採用되지 못하고 말았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