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第一次 倭亂과 李舜臣의 活躍
【豐臣秀吉의 妄想】 이때 日本에는 豐臣秀吉이란 怪傑이 있어 어수선한 그 나라를 統一하고 지나친 妄想을 일으키어 朝鮮과 明나라를 노리려 하여 먼저 對馬島主로 하여금 (우리의 內情을 살피게 하는 同時에) 朝鮮에 對하여 明을 칠 터이니 길을 빌리라 하였다. 물론 朝廷에서는 이를 허락할 性質의 것이 아니므로 拒絶하였다.
宣祖 二十五年(壬辰) 秀吉은 드디어 小西行長 加藤淸正 黑山長政 以下 諸將에게 十五萬 大軍을 주어 朝鮮을 侵入하게 하였다. 【倭軍의 上陸】 이 해 四月에 敵의 釜山 上陸의 急報가 들어오매 朝廷에서는 당황하여 李鎰(일) 申砬(립) 등 날랜 장수를 연방 보내어 倭軍의 進路를 막았으나 모조리 봉패(逢敗)하였다. 【平壤占據】 宣祖는 부득이 서울을 버리고 義州로 向하니 敵은 무난히 쳐 들어와 서울을 占領하고 一派는 東北(咸鏡道)으로 向하고 一派는 西北(平安道)으로 平壤에 닥쳐 왔었다.(六月) 불과 두 달 동안에 敵이 이와 같이 깊이 쳐 들어온 것은 물론 오랜 安逸 속에 우리 군대의 訓練이 부족하고 防備가 허수하였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敵에게는 이때 鳥銃이란 新銳 武器가 있어 特別한 効果를 나타냈던 까닭이다.
海上 方面에 있어는 처음 慶尙右水使(本營은 巨濟島) 元均의 過失로 因하여 敵으로 하여금 쉽사리 上陸케 하였던 것이다. 그 후 敵의 海上活動 내지 補給을 處處에서 분쇄하여 猛威를 나타내는 同時에 항상 制海權을 잡았던 이는 全羅左水使(本營은 麗水) 李舜臣이었다. 【李舜臣의 龜船과 活躍】 그는 일즉부터 이러한 일이 있을까 하여 미리 모든 戰艦을 수리하고 군사를 조련하였는데 그 戰艦 中에는 龜船이란 거북 비슷한 모양의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무수한 鐵송곳을 꽂고 안에는 前後 左右로 銃砲를 걸어 노아 攻擊에 당돌하고 움직임에 재빠른 배가 있었다. 이러한 이름의 배는 近世 初期로부터 있었으나 이러한 구조와 장치는 李舜臣 장군이 特히 創造하였던 것이다. 장군은 다른 水軍과도 連絡하여 모든 戰鬪 準備를 마친 후 屢次 艦隊를 이끌고 敵의 水軍을 번번히 쳐 깨트렸는데 第一次로 玉浦(巨濟島 東岸)에서 第二次로 泗川·唐浦(統營 附近)·唐項浦(固城 會華面)에서, 【閑山島海戰】 그 후 第三次로 閑山島(巨濟와 固城 사이) 앞바다에서 敵船을 모조리 쳐 부시어 敵의 혼담을 꺽는 대첩(大捷)을 올리었다. 特히 閑山島海戰은 유명한 싸움으로 우리 軍은 이 싸움에서 敵 艦船 七十餘隻을 파멸하고 무수한 敵兵을 바다 속에 장사하였던 것이다. 舜臣의 이러한 活躍 때문에 倭軍이 멀리 西海로 通치 못함은 물론이요. 全羅 南岸에도 침범치 못하였던 것이다. 위의 戰功으로 舜臣은 후에 三路(忠淸·全羅·慶尙) 水軍統制使가 되어 閑山島에 統營을 두고 三道 海軍의 總指揮官의 任에 當하였다.
【國內 各處의 義兵】 이때 國內 各處에서는 모든 階級의 사람들이 義憤에 불타 趙憲 郭再祐 高敬命 金千鎰 鄭文孚와 같은 儒者들과 休靜(西山大師) 및 그 弟子 惟政(泗溟堂) 같은 僧侶들도 義兵(義勇軍)을 일으켜 到處에서 敵과 싸워 혹은 肉彈으로 壯烈한 죽엄을 한 이도 있고 혹은 敵을 쳐 부시어 功을 세운 이도 있었다.
【明의 救援】 朝鮮의 要請으로 明에서는 처음 將兵을 보내어 倭의 西北 根據地인 平壤을 치다가 失敗하고 그 다음 日本 事情에 通한 沈惟敬이란 자를 平壤에 보내어 休戰을 꾀하게 하는 同時에 일변 李如松에게 大兵을 주어 朝鮮을 救援케 하였다. 如松은 我軍과 힘을 아울러 平壤을 쳐서 빼앗으매(癸巳 正月) 倭는 南으로 물러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如公은 乘勝의 氣勢로 倭軍의 뒤를 쫓아오다가 碧躋館(高陽) 싸움에서 大敗를 입고 겨우 몸을 빠치어 달아나니 倭軍은 일시 京城에 머무러 있었다. 【幸州大捷】 이때 官軍으로 京城 附近에서 외로히 敵과 싸워 大捷을 올린 이는 全羅監司 權慄(율)이니, 즉 그는 이 해(癸巳) 三月에 幸州山城(西漢江 邊)에서 背水陣을 치고 大敵을 맞이하여 孤軍奮鬪로 통쾌히 쳐 부시었던 것이다.
李如松의 敗北 後 明의 說客 沈惟敬이 서울에 와서 또다시 和議를 제창하매 倭軍은 海上 陸上을 通하여 朝鮮軍의 活刺(랄) 其他 補給의 困難 등 여러 가지로 形勢가 不利하므로 할 수 없이 和議에 應하여 京城을 撤退하였다(癸巳 四月). 明軍이 이어 入城하여 또 倭軍의 뒤를 쫓으니 倭軍은 멀리 南으로 달아나 釜山을 根據로 하고 南方의 要地인 晋州城을 攻圍하였다. 【晉州陷落】 城은 前年 十月에 牧使 金時敏의 굳센 抵抗으로 敵이 大損害를 입고 물러간 곳이어니와 그 후 時敏은 戰傷으로 죽고 그 대신 徐元禮가 牧使로 被任되었었다. 이때에 역시 牧使 以下 軍官民이 한덩어리가 되어 끝까지 城을 死守하다가 마침내 城의 함락과 運命을 같이하고 말았다(同年 六月).
金時敏의 晋州固守, 李舜臣의 閑山島海戰, 權慄의 幸州싸움은 壬辰 三大捷으로 꼽는 것이지만 徐元禮 以下의 壯烈한 죽엄도 朝鮮의 魂을 보인 것의 하나라 하겠다. 倭軍은 熊川(昌原)과 西生浦(蔚山) 사이에 城壘를 쌓고 오래 머물기를 꾀하더니 그 후 和議가 進行됨에 따라 大部分은 徐徐히 自國으로 물러갔다.
【還都】 京城이 회복되자 宣祖 以下 諸臣도 徐徐히 北에서 還都하여(癸巳 十月) 일변 復興에 착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