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近世의 中期(國紀 3901年-4057年 宣祖元年-景宗末年)第二章 倭亂과 李舜臣

五. 戰後의 國內형편과 國交回復

【朝鮮의 瘡痍】 七年에 걸친 戰役이 朝·明·日 三國에 준 影響은 대단히 커서 三國이 다 疲弊를 느끼었지만 中에도 朝鮮은 더 甚하였으니, 敵의 侵攻을 받는 外에 明軍의 북세와 등쌀에 또한 精神上 物質上의 적지 않은 影響을 받았던 것이다. 戰役 中에 얼마나 많은 國內 人口가 消耗되었는지는 戰前 戰後의 戶口에 關한 統計조차 傳치 아니하므로 이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平時 京城의 戶數가 八 九萬 이었던 것이 壬亂後에는 겨우 數萬戶에 지나지 못하였다는 記錄을 보면 全體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其他 都市 農村의 疲弊도 가히 想像할 수 있지만 其中에도 慶尙 一道는 倭寇 侵人의 門戶요. 또 일시 그들의 根據地이었던만큼 다른 곳보다도 더 큰 被害를 입었었다(또 흔히 戰後에 따르는 飢饉과 疾疫으로 많은 人命을 잃었다).

그러나 그 후 上下 官民이 戰後 復興에 온갓 힘을 다 하였던 까닭에 차차 平時狀態로 돌라가게 되었다. 【倭人에 對한 敵愾心】 戰後에 있어 朝鮮人의 愛國心과 民族的 意識은 決코 前日의 比가 아니었고 倭人에 對한 敵愾心이라던지 明나라에 對한 崇慕心은 더욱 强烈하였던 것이다. 즉 明은 朝鮮에 對하여 再造의 恩이 있다 하여 우리 知識層의 尊明思想 事大主義는 날로 커갈 뿐이었다. 이러한 思想과 主義는 後日 明이 亡하고 淸이 일어나 이와 關係를 맺은 후에도 變함이 없었다.

【日本과의 國交回復】 日本에서는 秀吉이 죽은 후에 德川家康이 그 뒤를 이어 國內를 정돈할새 먼저 朝鮮과 和를 맺으려하여 對馬島主를 通하여 여러 번 交涉이 있었으나 朝廷에서는 잘 듣지 아니하다가 宣朝 四十年에 이르러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前後하여 日本으로부터 我國人 男女의 俘虜된 자의 歸還도 많이 있었지만 歸還되지 못하고 그냥 눌러 산 자도 많았던 것이다. 【陶器製造術의 傳播】 歸還 不歸還을 물론하고 이들로 말미암아 日本에 傳播된 文物과 技術이 있었으니 陶器 製造의 技術과 같은 것은 그 두드러진 例이며 또 戰役 中에 倭人이 直接 약탈하여 가지고 간 것도 많았으니, 例하면 여러 가지의 圖書와 實物과 其他 活字 등이었다. 【朝鮮活字의 模倣】 그리하여 日本서는 朝鮮 圖書의 重刊, 朝鮮 活字의 모방이 행하여져 日本 文化上에 이바지한 바도 적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德川幕府와의 修交는 위에 말한바와 같이 宣祖 四十年부터 시작되어 이후 거의 使臣의 往來가 그치지 아니하였고 對馬島와의 通商貿易도 光海君 初로부터 시작되어 釜山에 倭舘이 다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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