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光海朝의 胡人에 對한 備策
宣祖의 다음에 卽位한 光海郡 때에는 안으로 小北 大北의 黨人들이 政權을 잡아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킬새 【光海君의 悖倫行爲】 그들의 强請과 凶計에 빠져 王은 아우와 兄을 죽이고 또 母后(異生母) 仁穆大妃를 廢하여 西宮에 가두는 悖倫行爲를 하여 이로 因하여 後日 결국 廢位를 당하게 되었지만 【光海의 治蹟】 王은 한편으로 書籍의 編纂과 刊行이라든지 亂後 史庫의 整備라든지 武士 萬人을 試取하여 軍事를 장려한 것이든지 더욱 밖으로 國境 防備와 外交에 있어 항상 用意周到한 조처(措處)를 행한 것은 다 王의 훌륭한 治績이라 하겠다.
【胡人의 勃興】 이보다 앞서 滿洲에는 建州胡人(野人)의 누르하치(努爾哈赤)란 자가 일어나 建州(根據는 今 興京老城)를 中心으로 하여 모든 部族을 차차 統一하고 明나라의 邊境을 침략하더니 光海君 八年에는 지금의 興吉老城에서 드디어 自立하여 後金國汗이라 일컬었다. 明에서는 이를 듣고 將兵을 보내어 칠새 朝鮮에 對하여도 援兵을 請하니 朝鮮으로서는 三角關係에 있어 立場이 매우 困難하나 어찌할 수 없이 姜弘立 등을 보내어 明을 돕게 하였다. 明軍이 敗하매 弘立 등은 敵陣에 通하여 朝鮮의 出征이 不得已 하였다는 것을 表하고 그 무리와 함께 後金에 항복하였다.
그 후 後金國軍이 遼東을 함락하매 明將 毛文龍은 椵島(鐵山)에 陣을 베풀고 遼東을 항복하려 하여 朝鮮과의 사이에 緊密한 連絡과 活躍을 取하려 하니 朝鮮의 事情은 더욱 困難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光海君은 朴燁(엽)이란 智略이 깊은 사람을 平安監司에 任命하여 그곳에 오래 있어 國境을 嚴히 防備하는 한편 後金의 內情을 정탐하게 하여 朝廷과의 連絡을 緊密히 하였으므로 光海君 당시에는 後金이 朝鮮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