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仁祖의 反正과 胡亂
앞서 말한 光海君의 癈母事件은 지금껏 北人에 눌려 지내던 西人에게 좋은 理由꺼리가 되어 西人은 마침내 이를 理由로 光海君을 癈하고 대신 仁祖를 세우게 되었다. 이른바 仁祖反正이라는 것이니 이 反正에 따라 앞서 癈母를 强請하던 北人 李爾瞻·鄭仁弘 등 數十人은 極刑에 處하고 그 나머지도 귀양가고 쫓겨난 자가 약 數百人이었다. 그리하여 北人의 政權은 저절로 西人의 손으로 넘어 왔다.
그 후 西人間에 功을 다투는 난리(李适의 亂)와 黨爭이 있어 어수선한 사이에 後金의 太宗(누르하치의 아들)이 군사를 보내어 쳐 들어오매 朝廷에서는 亂을 江華島로 避하더니 할 수 없이 거기서 和義를 맺고 兄弟國의 約과 其他 몇 가지의 條件을 許하고 돌려보냈다.(仁祖 五年) 이것을 丁卯胡亂이라 한다. 仁祖 十四年에 後金 太宗은 大淸皇帝라 하였는데 이때 朝鮮이 淸과 和를 끊고 明과 通하므로 太宗은 親히 十萬의 大軍을 이끌고 쳐 들어오니 仁祖는 南漢山城으로 避難하였다. 【仁祖降服】 淸太宗은 京城에 들어와 일변 王族과 貴族이 避難해 있는 江華島를 함락하고 南漢山城의 包圍를 甚히 하므로 이때 城內에서는 朝臣간에 主戰派와 主和派가 한참 어수선히 다투다가 마침내 主和派 崔鳴吉의 말을 쫓아 城門을 열고 三田渡(松坡)에 이르러 항복하니 이것이 丙子胡亂이란 것으로 近世史上에 처음 나타나는 一大 耻辱的인 事實이었다.
丙子의 亂後 그 耻辱을 씻으려 하여 義州府尹 林慶業은 몰래 明과 通하여 淸을 치고저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어 明이 淸에게 亡하였으며 일찌기 淸에 人質로 갔던 孝宗이 仁祖의 뒤를 이어 北으로 淸을 치려 하여 여러 가지 準備를 하였다. 그러나 王도 역시 在位 十年에 돌아가매 이 計劃도 水泡로 돌아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