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英·正 時代의 擧藝
【學風】 英·正 時代의 學界를 槪觀하면 아직도 순연히 空理 空談의 편파한 理學을 되푸리하는 派가 있었지만 一部 學者間에는 안으로 李瀷(星湖) 一派의 學風과 밖으로 淸朝 考證學의 影響을 입어 實用實事를 主로하고 博學多聞을 기치(旗幟)로 하는 學風이 일어나 單調한 半島 學界의 寂寞을 깨친 일이 있었다.
申景濬(旅庵)·徐命膺(保晩齋)·洪良浩(耳溪)-洪大容(湛軒)·朴趾源(燕岩)·李德懋(雅亭)·柳得恭(惠風)·朴齊家(楚亭)·成海應(硏經齋)·申綽(石泉)·丁若鏞(茶山) 等은 다 이때 이 新學風의 巨匠으로 其中 徐命膺·洪良浩·洪大容·朴趾源·朴齊家·李德懋·柳得恭 등은 北京에 奉使 혹은 隨行員으로 가서 淸朝의 文物을 구경하고 당시 淸朝의 名流들과 交遊하여 그 見聞을 넓히고 淸朝 文化의 極盛을 흠모(欽慕)하였다.
【北學論派】 그리하여 朴齊家와 같은 이는 北으로 淸朝의 物質文化를 불가불 배워야 하겠다는 趣旨 밑에서 北學議란 책을 著述하기까지 하였고 朴趾源도 역시 이 北學派의 巨頭로 燕行日記란 책을 지었지만 특히 그의 文章은 古今文體를 融合하여 自家獨特의 新境界를 開拓하였던 것이다. 李德懋·朴齊家·柳得恭은 詩人으로도 유명하여 李書九(薑山)와 함께 四家의 稱를 듣거니와 그들의 詩文은 當時 淸國人의 激讚을 받기까지 하였다. 成海應·申綽(작)·丁若鏞의 三人은 北京에 발을 디딘 일은 없었지만 항상 新來의 書籍을 보아 깊이 淸朝 考證學의 影響을 입고 다 훌륭한 著書를 남기었는데 成氏·丁氏의 著述은 방대(厖大)하고 多方面的이며 其中에도 丁氏의 것이 더욱 그러하다.
【金正喜】 以上 여러 大家보다는 後輩지만 淸朝 考證學의 影響을 가장 濃厚히 또 가장 直接的으로 받은 이는 金正喜(秋史 혹은 阮堂)이었다. 그는 二十四歲(純祖 九年)에 使行을 따러 北京에 가서 淸朝의 大家인 翁方綱·阮元 등과 交遊하여 일찍부터 視野를 넓히었지만 非凡한 才質로 그 후 꾸준한 硏磨를 쌓아 經學과 金石學에 새 權威를 세웠고 더욱 書家로 이름을 높이 날리었으니 그의 글씨는 古今 書法의 眞髓를 얻어가지고 自家獨特의 書體를 비저낸 것으로 半島書道史上에 一大 奇觀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 金正喜의 글씨를 위에 말한 朴趾源(燕岩)의 文章과 또 同時代의 畫家로 역시 獨步의 稱을 듣는 金弘道(檀圖)의 그림과 아울러 後期 藝園의 三高峰이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