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역대 국사교과서第三編 近世(李氏朝鮮)近世의 後期(國紀 4058年-4243年 英祖元年-純宗末)

第二章 天主敎의 傳來와 迫害

天主敎에 關한 書籍이 宣·光 時代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西洋 科學書類와 함께 一部 學者간에 注意를 이끌게 되었다 함은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얼마동안은 순연한 學的 好奇心과 知的 探究慾을 가지고 그런 書籍을 對한데 不過하였던 것이다. 그 후 天主敎書는 점점 民間에 流行되어 거기에 對한 信仰과 實踐運動이 차차 일어났으니 이때 政權을 잃은 南人 學者와 其他 不平이 많은 階級과 地方에서 特히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天主敎의 實踐運動】 그리하여 南人 名士의 一人인 李承薰은 正祖 七年(國紀 4116 西紀 1783) 겨울에 아버지를 따라 北京에 갔을 때 西洋人 神父에게 洗禮를 받고 많은 書籍을 求하여 가지고 돌아왔었다. 이것이 南人 新進派의 天主敎 實踐運動에 있어 가장 記錄的이요 가장 꽃다운 場面으로 이때 그 方面 人士에게 刺戟과 影響을 줌이 매우 컸었다.

【天主敎에 對한 彈壓】 이 信仰 實踐運動이 熱烈하여짐에 따라 士類로 신주를 파묻고 제사를 폐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니 儒敎를 根本으로 삼는 在來의 傳統과는 여간 背馳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正祖 十年 以後 朝廷에서는 이를 雅學이라 하여 法으로써 禁하고 中國으로부터의 모든 書籍의 輸入을 嚴禁하였으며 同王 十五年(辛亥)에는 士人으로 신주를 살려 없앤 尹持忠 權尙然을 死刑에 處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正祖는 원악 寬大한 政策을 써서 後日에서처럼 그렇게 廣範圍에 걸친 甚한 虐殺과 迫害는 加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周文謨의 入國】 正祖 十九年(國紀 4127 西紀 1794)에 周文謨란 淸人의 天主敎 神父가 朝鮮에 발을 들여놓아 이후 七年간 비밀히 傳道에 從事하매 信者의 數가 날로 늘어가더니 正祖가 下世하고 純祖가 卽位하여 大王大妃 金氏(英祖妃)가 後見함에 이르려는 天主敎에 對하여 혹독한 迫害가 나리어 無數한 信者가 잡히어 죽었다. 【辛西邪獻】 즉 위의 李承薰을 비롯하여 李家煥·丁若鍾·黃嗣永 等 南人 名士는 다 목숨을 빼았기고 그들의 家族姻戚으로 여기에 관련되어 혹은 죽고 혹은 귀양간 이가 많았으며 神父 吉文謨도 自首하여 死刑에 就하였다. 이것이 純祖元年 辛西에 일어났으므로 해서 辛西邪獄이라 한다.

그러나 禁하면 禁할수록 더 커지는 朝鮮의 天主敎는 그후 憲宗 二年(國紀 4169 西紀 1836)에 세 사람의 西洋人 神父(鄭牙各伯·羅伯多祿·范世享)를 처음으로 마지 하였더니 【己亥邪獄】 同王 五年(己亥)에 이것이 발각되어 神父 三人과 敎徒 三十餘名이 잡히어 죽었다.(己亥邪獄)

이 해 朝廷에서는 西敎를 철저히 禁하기 爲하여 「五家作統」의 法을 마련하여 一般에 실행하게 하였으니 이는 다섯 집을 一統으로 하여 自治的으로 敎를 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 因하여 敎勢가 매우 쇠하였으나 그 후 敎徒는 숨어서 活動을 하고 또 西洋人 神父도 몰래 들어오고 그리하여 金大建이란 朝鮮人 最初의 神父까지도 생기게 되더니 同王 十二年(丙午)에 그는 잡히어 죽고 말았다. 다음 哲宗 때에 禁令이 좀 느추어지매 敎徒의 數가 다시 와짝 늘고 많은 西敎의 敎士도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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