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약용의 과학기술론
실학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히는 정약용(1762∼1836)은 당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서양 근대과학을 어떻게 보았던 것인가.600) 그가 젊었을 때에는 서양책을 읽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 일대 유행이었다고 회고한 일이 있다. 정확히 어느 때를 회상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1780년대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때는 또한 박제가가 서양선교사를 초빙해다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자고 나선 시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정조 10년(1786) 초에 박제가는 선교사 초빙론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정약용의 방대한 문집 가운데에는 실제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소개하거나 다룬 글은 별로 많지 않다. 순조 원년의 기독교 박해과정에서 한 형이 사형을 당하고 다른 형과 함께 유배길에 들어갔던 그에게는 서학을 함부로 다루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있었고, 이미 적지 않은 글도 썼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가 이미 썼던 글 가운데 상당 부분은 지금 전하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가운데에는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글도 적지 않게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형의 묘지명으로 쓴 글 중에 정조 14년의 과거에서 그의 형 丁若銓이 五行에 대한 시험문제에 대해 서양의 四行說로 대답하여 장원급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사실로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가 사행설을 지지한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모호한 태도는 서양의 우주관이나 지동설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모호한 태도로 나타난다. 그는 여러 가지 서양과학의 내용을 글로 썼지만 그것에 대해 옳고 그른 판단을 유보하는 듯한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더구나 그가 우두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가 보여준 서양과학에 대한 모호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의 저서≪麻科會通≫끝에는 서양의 우두법이 아주 간단히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이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가하지 않고 있다. 단지 중국에 도입된 우두법을 한역서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 삽입하는 방법으로 소개만 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 李圭景이 쓴 기록을 보더라도 정약용은 이미 우두법을 시험해 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6명이 요절했다. 혹시 이들 자녀를 천연두로 잃고 그의 우두에 대한 집념이 높아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청나라에 들어온 우두에 관한 정보를 책 끝에 부록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런 서양과학에 대한 일관된「무관심하기」는 분명히 위장된 태도라고 판단할 수 있다. 가톨릭집안으로 그 자신 한때는 분명히 천주교에 기울어졌거나 신자가 되었던 그는 순조 원년의 유배를 분수령으로 그의 서학적 과거를 정리하고 온건한 전통주의자로 처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지적 갈등 속에서 정약용의 글 가운데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또 받아들이자던 부분은 사라져 버리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실상도 극소한도로 기술되기에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그는 기술의 발달이 인간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일반론을 펼쳐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남겼다. 또 같은 맥락에서 그는 利用監이란 관청을 두고 해마다 과학기술자와 중국어 통역을 중국에 파견해서 그 곳의 앞선 기술을 배워 오자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에서 기술을 배워 오자고 강조하면서 박제가의 글에서 자극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북학론은 서양 과학기술을 꼬집어 배우자고 말하고 있지도 않고, 또 박제가처럼 서양선교사를 초빙해서 그 기술을 배우자고 말하는 법도 없다. 정약용의 서양 과학기술 및 서학에 대한 위장된「무관심하기」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상정부론이라 할 수 있는≪經世遺表≫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이용감은 분명히 중국을 통한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을 목적으로 한 기구이다. 그는 해마다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 2명과 관상감에서 과학기술 전문가 2명씩을 선발해 중국에 보내되, 거기서 배워 온 지식을 국내에 잘 보급한 사람은 지방관으로 선발하여 승진시켜 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중인으로 고정되어 신분상의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역관과 과학기술자들도 양반과 같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의 신분제사회를 타파해야 한다는 의지도 아울러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대에 그의 생각이 채택될 형편은 아니었다. 순조 원년 이후 그는 유배생활을 계속했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미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지는 않았다.
600) | 朴星來,<丁若鏞의 과학사상>(≪茶山學報≫1, 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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