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포양식
多包樣式이란 건물에 가구되는 두공 즉 包作이 많은 형식의 건축양식을 말하는 것이며, 주심포양식과는 달리 두공이 기둥 윗부분과 기둥 사이 상부에 1구 이상 가구되는 양식을 말한다. 원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면서 그들의 발상지였던 화북지방에서 성행하던 두공을 많이 가구하여 장중하고 위풍있게 보이는 건축양식을 중원으로 가져다가 그들의 궁궐 등에 즐겨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 건축양식이 고려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다포양식이 도입되고 정착되는 과정은 주심포양식의 경우와는 달리 원에서 건립되고 있던 다포양식의 건물이 그대로 고려로 옮겨지게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충렬왕 2년(1277)에 왕비인 제국대장공주를 위한 수령궁을 건립하는데 원의 기술자를 불러들여 공사를 진행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원의 기술자에 의해 건립된 궁전이라면 그 당시의 정세로 보아 당연히 원에서 성행하고 있던 장중하고 위풍있는 건축양식인 다포양식의 건물로 건립되었을 것이고, 또 그 건물의 모습은 원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다포양식의 건물과 똑같은 건물이었을 것이다.0664)
다포양식이 도입된 직후에는 원의 그것과 똑같은 형태의 건물을 짓게 된 것으로 믿어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두나 소로 굽의 반곡된 곡면이 경사진 평면으로 변하는 등 세부 양식에 변화를 나타내면서 고려 멸망 직전에서 조선 초기에는 궁궐의 주요 건물이나 도성의 문루와 사찰의 주요 법당 등에 채택되고, 중기 이후에는 권위를 세우려는 건물에 널리 채용되었다. 고려의 다포양식의 건물은 똑같은 건축양식을 도입하여 정착시킨 이른바 일본의 禪宗樣(또는 唐樣)이나 중국의 이 계통의 건물과도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다포양식이 고려에 도입된 직후에 세워진 목조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 말기에 건립된 목조탑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충실히 모각하여 건립한 敬天寺 十層石塔에서 도입된 직후의 다포양식의 목조건물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석탑에 조각된 두공의 주두나 소로 굽은 분명히 반곡된 곡면을 나타내고 있으며, 일본의 선종양으로 된 건물에서도 주두와 소로 굽이 곡면으로 처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다포양식의 두공은 주두와 소로 굽이 반곡된 곡면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현존하는 모든 다포양식의 건물은 이미 변화된 상태로 정착된 양식을 지닌 건물뿐이다. 이들 변화 정착된 우리 나라 다포양식의 양식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둥 위와 창방 위에 넓고 두툼한 平枋을 돌리고 그 위에 두공을 설치하며, 보통의 경우 두공을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 1구 이상 설치하는데, 이를 空間包라고 한다.
둘째, 두공의 출목은 3출목이 넘는 경우도 있고, 건물의 내부와 외부의 출목이 같은 것이 일반적이나, 내부출목이 외부출목보다 1출목 더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천장을 좀더 높게 가구하기 위한 방법이다.
셋째, 두공의 주두와 소로 굽을 경사진 평면으로 만들어 굽받침이 없고, 첨차 끝의 절단면과 下角部 전체를 하나의 弧形으로 만들거나 하각부만을 호형으로 만든 이른바 翹頭形으로 만들며, 건물에서 앞으로 돌출되는 첨차 즉 제공첨차의 2출목 첨차부터 그 위에 짜여지는 첨차 끝은 牛舌 또는 쇠서라고 불리는 끝을 단면 5각형으로 가늘게 만들어 밑으로 경사지게 한다.
넷째, 보의 단면은 장방형이며, 보 양끝에서도 보의 키를 줄이지 않고 폭만을 줄여 기둥에 끼운다.
다섯째, 건물 내부에 천장을 가구하며 많은 경우 格子천장으로 꾸민다. 따라서 옥개가구는 천장에 의해 가리워지기 때문에 옥개가구재들은 장식적 의장을 가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다포양식의 건물은 많은 경우 지붕을 팔작지붕으로 만들며, 맞배지붕의 경우에는 건물 측면에 두공을 가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또 일반적으로 기둥은 비교적 배흘림이 약하고 가는 기둥을 사용한다. 다포양식 자체가 장중하고 위풍있는 양식이며, 이 분위기에 팔작지붕이 잘 조화될 뿐만 아니라 지붕 처마가 사방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건물 측면에도 두공을 가구할 수 있어 건물을 더욱 장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팔작지붕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둥의 배흘림이 약하고 가는 것은 다포양식의 건물이 구조적으로 지붕 하중을 두공을 통하여 평방에 전달하고, 평방에서는 기둥과 벽체에 고루 하중을 전달하는 구조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기둥이 지탱하여야 하는 하중이 적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0664) | 杉山信三,≪韓國の中世建築≫(相模書房, 1984), 375∼37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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