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악지」에 나타난 당악 정재와 향악 정재

고려시대에 연행된 궁중 정재의 종목은 『고려사』 「악지」에 전한다. 헌선도, 수연장(壽延長), 포구락(抛毬樂), 연화대(蓮花臺), 오양선(五羊仙)은 군
왕을 축수하는 내용의 당악 정재다. 이 가운데 헌선도와 포구락은 고려 문종대에 상연된 기록이 있어서 유입 연대를 짐작할 수 있으나, 나머지는 유입 연대를 알 수 없다.
헌선도는 정월 대보름날 가회(嘉會)에서 군왕을 송수하기 위해 서왕모가 선계에서 내려와 선도를 드린다는 줄거리로 된 가무희다. 『고려사』에 따르면, 하청절(河淸節)에 대악서와 관현방에서 다투어 헌선도와 포구락 등을 상연하였다고 한다.94) 이규보의 한시 「기사년 4월 초파일 한림에서 아뢰어 바침(己巳年燈夕翰林奏呈)」 중 문기장자시(文機障子詩) 2수에 헌선도로 보이는 가무희가 묘사되어 있어,95) 헌선도는 그 이전에 고려에 유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교방기』 곡명의 「대헌수(大獻壽)」, 『송사(宋史)』 「악지」 중 곡파선여궁(曲破仙呂宮)의 왕모도(王母桃), 『철경록(輟耕錄)』의 왕모축수(王母祝壽) 등은 서왕모의 헌도(獻桃)에 관한 이야기로, 중국에서는 왕모헌도(王母獻桃)가 보편화된 것으로서 모두 가무(歌舞)를 수반한 연희였다.96) 그러므로 고려 궁중 정재인 헌선도는 ‘헌수(獻壽)’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왕모헌도 이야기와 동일하여 궁정 연회에서 연행하기에 적합한 내용이었다.
수연장은 16명의 무원(舞員)으로 구성되는 가무희로, 상원에 군왕에게 술을 올리며 축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헌선도나 포구락과 마찬가지로 수연장의 유입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고려사』 「최승로전(崔承老傳)」
의 “옛날에 덕종 왕비의 부친 왕경선과 부마 고념이 왕의 수명 연장을 빌기 위하여 금과 동으로 불상을 주조해 바쳤다.”에 근거를 두고, 이것이 수연장의 연원일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오양선은 군왕을 송수하는 내용의 왕모출장(王母出場) 정재로서 역시 정확한 유입 시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고고(高固)가 초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다섯 사람의 신선이 오색(五色)의 양(羊)을 타고 한 줄기에 여섯 개의 이삭이 달린 수수(六穗杻)를 고을 백성에게 주었다.”는 중국의 고사가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나오는 것을 통해 오양선의 유래를 추측하였다. 『악학궤범』에 보허자령의 악조(樂調)에 맞추어서 서왕모 및 그 옆의 다섯 명이 추는 춤이 ‘오양선무’라고 되어 있어, 궁중 정재 오양선은 이러한 특색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포구락은 연회에서 주흥(酒興)을 돕기 위한 것으로, 기녀 12명이 좌우로 여섯 명씩 편을 갈라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차례로 포구문의 동편과 서편에 공(彩毬)을 구멍으로 던져 통과시키는 놀이의 성격을 띤 가무희다. 이때 양편에서 한 명씩 번갈아 가며 나와서 같은 내용의 창사(唱詞)를 부르므로, 포구락의 가사는 모두 6종이며,97) 구멍에 공을 넣으면 상으로 꽃을 주고, 넣지 못하면 벌로 얼굴에 먹점을 찍는다. 『고려사』에는 1073년(문종 27) 11월 교방 여제자 초영 등 13명이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구장기별기와 함께 상연한 것으로 되어 있어, 포구락이 고려에 유입된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포구락의 연원과 관련하여 송대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기록을 인용하고, 이 고사가 포구락의 제작 배경일 것으로 추정하였다.98)
연화대는 두 동녀가 연꽃 술로 생겨났다가 왕의 덕화(德化)에 감격하여 가무로 그 즐거움을 전달한다는 내용의 궁중 정재다. 유입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재는 학무와 처용무가 합설된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 「악지」에서는 연화대의 기원에 대하여 “연화대는 본래 탁발(拓
跋, 중국 북위 왕조를 세운 씨족)의 위나라에서 나왔다. 여동(女童)을 쓰는데, 의복과 모자를 조촐하게 차린다. 모자에는 쇠방울을 달아서 장단에 맞추어 움직이면 소리가 난다. 그들을 두 연꽃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꽃이 터진 후에 보이게 한다. 춤 가운데 아묘(雅妙)한 것으로 그것이 전해 내려온 지가 오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99) 이 기록에 따르면, 연화대는 탁발위에서 유래하였다. 연화대는 대곡(大曲) 자지무(柘枝舞)100)의 일부로서, 본래 당나라 때 서역의 석국(石國)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것이 당송(唐宋)을 거쳐 고려에 들어온 것이라는 서역 기원설이 유력하다.
한편 『고려사』에는 무고(舞鼓), 동동(動動), 무애(無㝵)와 같은 향악 정재도 전하고 있다. 이 중 무고는 고려시대부터 전해 오는 향악 정재로, 『고려사』에 “고려 충렬왕 때 시중 이혼(李混)이 영해(寧海)에 귀양갔을 때 바다 위에 떠내려오는 뗏목을 얻어 이로써 무고를 만들었는데, 지금 악부(樂府)
에 전한다.”고 설명되어 있다.101) 『고려사』의 무고는 두 사람이 하나의 북을 가운데 놓고 추는 일고무(一鼓舞)로서 「정읍사」에 맞추어 춤을 추었으나, 『악학궤범』에서는 일고무 외에도 사고무(四鼓舞)·팔고무(八鼓舞) 등 그 형식이 다양해졌고, 장구 소리에 따라 북을 치며 춤을 추기도 하였다.102)
동동은 동동사(動動詞)에 맞추어 추는 정재로서 1449년(세종 31) 10월까지는 ‘동동 정재(動動呈才)’로 소개되다가,103) 『악학궤범』에 이르러서는 상아로 만든 박(拍)을 치면서 춤을 춘다고 하여 ‘아박(牙拍)’으로 명명되었다.
무애는 『고려사』 「악지」에 “무애지희는 서역에서 나왔고, 가사에 불가(佛家)의 말이 많고 방언이 섞여 있어 싣기 어려우므로 절주(節奏)만 남겨 사용하던 음악을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104) 무애무가 아니라 무애지희(無㝵之戲)라고 한 것으로 보아 민간의 연희 내지 춤을 궁중에서 유입했을 가능성이 크다.105)
94) |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21년 4월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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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13, 고율시(古律詩), 「기사년 4월 초파일 한림에서 아뢰어 바침(己巳年燈夕翰林奏呈)」. |
96) | 김학주, 『한·중 두 나라의 가무와 잡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213∼214쪽. |
97) | 『악학궤범』의 포구락은 여덟 명씩 2대(隊)로 갈려 각 대에서 차례로 한 명씩 나와 포구희를 하고, 좌우편 기녀가 서로 다른 창사를 부르므로 창은 모두 16회를 하고, 가사 16종으로 되어 있는 것이 『고려사』에 기록된 포구락과 다르다. |
98) | 중국 해주(海州)에 사는 이신언(李愼言)이란 선비가 꿈에서 수전(水殿)에 갔는데, 그곳에서 궁녀들이 공놀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 내용을 후에 산양(山陽) 사람 채승(蔡繩)이 전기(傳奇) 소설로 만들어서 자세하게 서술했는데, 채승의 글에 포구곡(抛毬曲) 10여 결이 들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2결만 제시되어 있다. |
99) | 『고려사』 권71, 지25, 악2, 당악 연화대(蓮花臺). |
100) | 자지(哽枝)는 석국(石國, 오늘날의 타슈켄트)의 음역(音譯)일 것으로 추정된다. |
101) | 『고려사』 권108, 열전21, 이혼(李混). |
102) | 조선 후기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따르면, 북은 하나를 쓰더라도 북을 치는 원무(元舞) 두 명에 협무(挾舞) 두 명, 또는 원무 네 명에 협무 여덟 명, 또는 원무 네 명에 협무 16명이 등장하는 등 『악학궤범』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해졌다. 더욱이 여기와 무동이 추는 춤으로 구분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무고의 변화상은 다른 향악 정재보다 복잡하다. |
103) | 『세종실록』 권126, 세종 31년 10월 3일 경술. |
104) | 『고려사』 권71, 지25, 악2, 속악(俗樂), 무애(無㝵). |
105) | 고려시대 정재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는 전경욱, 앞의 책, 201∼211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