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문화·예술 이야기

해설

책거리(冊架圖)

‘책거리(冊巨里)’란 책을 비롯한 여러 기물을 책장 가득히 그린 그림이다. ‘거리(巨里)’란 ‘걸어두는 것(선반)’을 의미하므로, ‘책거리’를 직역하면 ‘책을 두는 선반’ 즉 ‘책가’라 할 수 있다. ‘책가도(冊架圖)’는 책거리의 한자식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책거리는 책장 없이 책과 기물만 그려지기도 하였다. 책장의 유무와 관계없이 넓은 의미에서 ‘책거리’라 부르거나, 이를 ‘문방책가도’라고 총칭하기도 한다.

책거리는 조선시대 18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책거리의 기원은 중국 청나라의 ‘다보격(多寶格)’을 그린 그림에 둘 수 있다. 다보격이란 여러 귀한 보물을 담은 상자 혹은 장식장을 일컫는다. 청나라 황실에서는 수장품을 모아 다보격을 제작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사실적으로 옮겨 그리기도 하였다. 청나라의 궁정에서 뿐 아니라 민가에서도 다보격을 그린 그림이 유행을 하였는데, 아마도 조선에서는 북경으로 사신을 간 일행들이 이를 접하고 들여왔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대 북경으로 사신을 간 조종현은 ‘서양국(西洋國) 서가도(書架圖)’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사실적인 서양화풍으로 책과 장식품을 그린 그림이었음을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조대에는 궁중에서 책거리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는 화원에게 ‘책가도’를 그리도록 하고 이를 어좌 뒤에 두었다. 그는 평소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때 책가도를 보면서 위안을 삼는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한편 ‘책거리’는 정조대 궁중 화원인 차비대령화원의 시험에 출제되기도 하였다. 시험 과목으로 ‘문방’이라는 화문이 신설되었고, 그 화문에 속한 하나의 화제로 ‘책거리’가 출제된 것이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중국에서 유입된 다보격도는 조선에서 ‘책가도’ 혹은 ‘책거리’란 이름으로 궁중에서 그려지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거리 안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물이 그려져 있을까. 초기 궁중 책거리에 그려진 기물들은 대부분 수입품으로서 사대부 남성의 서재에 두는 문구나 장식품이었다. 서책을 비롯해 두루마리 그림, 붓과 필통, 벼루와 연적 등의 문방구가 있다. 이들은 일상적인 필기구처럼 보이지만 고급 재료로 만들어질 경우 값비싼 명품 문구가 되었다. 중국의 청동으로 만든 고동기나 옥으로 만든 옥기, 채색 문양을 가진 분채자기도 있다. 이들은 장식품으로 놓고 보기도 하고, 향로나 찻잔, 꽃병 등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수선화, 불수감과 같은 구하기 어려운 귀한 꽃과 과일도 있다. 수선화는 이 무렵 중국에서 구근을 들여와 재배해보기 시작한 화초이며, 불수감은 중국 남부에서 재배되는 과일로서 조선인들은 아마도 실물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책거리에 놓여진 꽃과 과일은 지역만이 아니라 계절도 모두 달라서 실제로는 한 책장에 모을 수 없다. 책거리는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실제가 아닌 이상적인 공간인 것이다.

책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형식을 띠게 되었다. 처음에는 책장 안에 물건을 진열한 형태였으나 책장 없이 물건만 모아두거나 책장 대신 낮은 서안 위에 물건을 쌓아 올리는 형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책장을 그린 ‘책가형’ 책거리는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적이다. 예를 들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형록의 〈책가도>의 경우 체계적인 원근법을 적용하여 책장이 입체적으로 보이고, 기물에 음영을 주어 양감과 질감이 느껴진다. 책장 없이 기물을 나열한 ‘분산형’ 책거리는 빈 공간에 더 많은 기물을 나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형록의 〈문방도〉를 보면 책장을 없앰으로써 기물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책과 기물을 모두 왼쪽을 바라보게 가지런히 배열함으로써 나름의 질서를 부여하였다. 책거리 전문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형록은 이 두 유형을 번갈아가면서 제작하였다. 이를 보아 책거리는 책가형에서 비롯되었으나 아마도 궁중에서는 한동안 두 유형이 공존하였다고 여겨진다.

서안이나 탁자 위에 책과 기물을 쌓아 둔 ‘서안형’ 책거리는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전의 두 유형이 궁중 양식을 보인다면 ‘서안형’ 책거리는 소위 ‘민화’풍을 띠는 작품이 많다. 도화서 화원에 의해 그려졌던 앞의 두 유형과 달리 이 유형은 민간의 화가들에게도 널리 그려졌다. 이는 현존하는 책거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원근법이 파괴되고 상상력이 가미된 독창적인 유형이다. 책거리에 포함된 기물에 내용도 변화가 있다. 이전에는 사대부의 교양과 안목을 보여주는 문방구와 수입 장식품 위주였다면 이제는 복을 불러오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조선의 일상용품이 추가되었다. 자녀를 많이 낳기를 기원하며 씨가 많은 수박이나 포도 같은 과일을 그리기도 하고, 안경, 유리거울, 털모자 등 하나쯤 구비하면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 물건들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문인 남성의 기물만이 아니라 무관의 활과 칼, 여인의 옷과 장신구 등도 포함되게 되었다. 다양한 소비층을 위해서 물건의 종류가 다양해진 것이다.

기존 책거리의 형식 자체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책거리 안에 상상 속의 동물, 용이나 봉황이 들어가기도 하고, 문자도나 화조도 같은 다른 장르와 결합하기도 하였다. 인기 있는 주제의 그림을 하나의 그림 안에 섞어서 판매하는 시장 전략이었다. 그런 한편 책거리 초본은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같은 모양의 책거리가 양산되기도 하였다. 한 공방에서 대량 생산되는 책거리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변화된 제작 방식들은 책거리가 대중적으로 유행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책거리는 18세기 후반에 그려지기 시작되어 20세기 초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처음에는 중국의 다보격에서 영향을 받은 화제이지만 일단 조선의 책거리로 정착한 이후에는 다양하고 독창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의 방을 장식했던 민화 책거리는 근대 이후 사진과 영상의 발달로 한동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책거리는 현대 작가들에 의해 다시 활발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많은 물건들을 소비하는 현대 사회에서 책거리라는 화제는 물건에 대한 욕망과 애증을 투영하는 소재로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