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생의 하루 일과
성균관 유생의 하루는 기숙사에 걸려 있는 북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하였다. 동재의 가장 위쪽에 있는 방을 약방(藥房)이라고 하는데, 그 서쪽 창문에 재고(齋鼓)라고 부르는 북이 걸려 있었다. 성균관 기숙사에 속해 있던 노비들이 매일 새벽 북을 울리면서 유생들에게 “일어나시오.”라고 외치고, 곧 이어 북을 세 번 두드리며 “세수하시오.”라고 외친다.93) 유생들은 북소리와 노비들의 외침 소리에 잠을 깨어 세수를 하고, 의복을 바르게 갖추어 입은 후에 책을 꺼내 읽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성균관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 유생들은 모두 이곳에서 기숙하며 공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대개 동재에는 생원들이 거처하였고, 서재에는 진사들이 거처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붕당의 다툼이 심해지면서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도 파벌이 나누어져 동재에는 소론(少論)이 거주하고, 서재에는 노론(老論)이 거주하기도 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방이 모두 28개 있었는데 한 방에서 4명이 함께 생활하였다.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친한 사람이 있으면 같은 방을 쓸 수 있게 하였다. 동재와 서재의 아래쪽 2개의 방을 하재라고 부르고, 그 위쪽의 방은 상재라고 하였다. 상재에는 생원과 진사들이 거처하였으며, 하재에는 사학(四學)에서 올라오거나 문음으로 입학한 유생들이 거처하였다.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는 유생이라도 생원과 진사를 상재생이라고 부르고, 사학에서 올라온 유생들을 하재생 또는 기재생이라고 하여 서로 구별하였다. 평소에는 상재생이 하재생의 방에 가지 않게 하였다.
유생들의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면 부목(負木)이라고 하는 노비가 북을 두드렸다. 유생들은 모두 명륜당 앞뜰로 나와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할 수 있 는 대열로 섰다. 부목이 “인사하시오.”라고 크게 외치면 유생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허리를 굽혀 서로 인사를 한 후 식당으로 들어갔다. 생원은 동문을 통해 식당에 들어갔고, 진사는 서문을 통해 들어가 나이 순서대로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하재생들은 생원·진사의 아래쪽 자리에 앉았다.
식당에서의 여러 절차는 ‘식당직(食堂直)’이라는 노비가 맡아서 처리하였다. 유생들의 식사 시간이 되면 식당직은 도기를 식당으로 가져오고, 재직(齋直)들이 벼루, 먹, 붓을 가지고 와서 도기를 받아들었다. 재직은 성균관 기숙사에서 잡일을 맡아 하는 어린 노비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도기는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중요한 장부였기 때문에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유생들은 식당에 들어오면 도기에 자기 이름을 쓰고 수결(手決), 즉 서명을 하였다. 도기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의 표가 그려져 있어 각 칸에 한 사람씩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모든 유생이 기록을 마치면 하색장(下色掌, 학생회 임원)이나 조사(朝事, 나이 어린 유생)가 도기의 끝에 몇 명이 왔는지 확인하여 기록하였다. 유생들은 아침과 저녁 두 번 도기에 서명하여야 하루를 출석한 것으로 인정받아서 원점(圓點) 1점을 받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 원점을 기록한 도기는 성균관 대사성이 밀봉하여 보관하였다가 매달 예조에 보고하였다.
식당에서는 유생들이 빼곡히 앉아 밥상을 따로 놓을 공간이 없기 때문에 마포(麻布)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음식을 나누었다. 유생들의 식사에는 대개 밥, 국, 장, 김치, 나물, 젓갈, 좌반, 생채의 여덟 가지 음식이 차려졌다. 하지만 식당의 음식이 그다지 잘 나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에는 성균관 대사성이던 권채(權採)의 상소에 “학생들의 반찬이 나물뿐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숙하고 있는 자는 잘 먹지 못하여 병나는 자가 매우 많사오니 원하옵건대 양현고에 명하시어 두 사람에 쌀 반 되씩을 주어서 반찬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라 하였다. 유생들은 식당에서도 질서 정연하게 식사를 해야 하였다. 음식물이 모두 올려지기를 기다렸다가 부목들이 “밥 드십시오.”라고 외치면, 유생들은 일제히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부목들은 물을 올릴 때에도 “물 올립니다.”라고 외치고, 상을 물릴 때도 “상 물립니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부목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라고 소리친 뒤에야 유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하루 수업이 시작됨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면 유생들은 차례로 명륜당 앞뜰에 모여들었다. 대사성을 비롯한 여러 교관들은 명륜당에 앉아 있고, 유생들은 줄지어 서서 교관에게 읍례(揖禮)를 하였다. 수업은 9재(九齋)로 나뉘어 진행되었기 때문에 유생들은 다시 자신이 배워야 할 단계의 재(齋) 앞으로 가서 서로 마주 보고 읍례를 하였다.
오전에는 교관들이 분담한 내용을 강독하며 유생들을 가르쳤다. 성균관의 교관들은 능숙한 분야를 분담하여 수업을 하였는데, 교관이 몇 개의 구절을 읽고 뜻을 풀어 주면 유생들은 따라 읽고 암송하였다. 유생들은 배우고 있는 책을 가지고 교관에게 가서 먼저 전에 수업하였던 곳에서 어렵고 의심나는 점을 물어 토론하고 분석한 다음에야 새로운 수업을 받았다. 유생들은 공부할 때 많이 배우기만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책을 읽고 공부하는 데 졸거나 흐리멍덩한 생각을 하고 가르침을 받는 데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았다.
오후에는 그날 배운 것을 평가하는 일강(日講)을 실시하였다. 일강은 모든 유생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상재와 하재에서 한 명씩만 뽑아 배운 부분을 읽고 풀이하게 하였다. 교관은 유생이 경서를 잘 읽고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지 평가하였다. 일강을 통과하면 그것을 기록하고, 과거를 보는 식년(式年)에 일강에 통과한 횟수를 합하여 참고하였다. 일강을 하는데 내용이 정확하지 못하거나 잘 읽지 못하는 사람은 벌을 받거나 회초리를 맞았다. 일강을 행하는 유생을 제외한 나머지 유생들은 각자 공부한 내용이나 교관에게 배운 내용을 복습하였다.
유생들은 경서의 내용을 암기하기 위하여 죽첩경서(竹帖經書)라는 학습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죽첩경서는 경서의 첫 구절을 적어 둔 작은 대나무 수십 개로 되어 있어 하나씩 펼쳐 보며 경전을 외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 수업을 마치면 유생들은 기숙사로 돌아와서 다시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였다. 이와 같이 하루의 대부분을 공부하며 지냈기 때문에 과로로 쓰러져 죽는 경우도 생겼다. 나라에서는 기숙사에 약방을 두고 혜민서(惠民署)의 의원을 파견하여 유생들을 돌보게 하였다. 이와 같은 하루 일과는 유생들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한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을 떠날 때까지 매일 반복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휴가는 한 달에 이틀이었다. 매월 8일과 23일이 휴일이었는데, 이날에는 부모님을 찾아뵙거나 옷을 세탁하였다. 휴일이라도 활쏘기, 바둑, 사냥, 낚시 등 놀이를 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를 어기면 벌을 주었다. 하지만 젊은 유생들이 때때로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휴가를 얻어 놀러 가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1442년(세종 24)에 성균관과 학당의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삼각산에 놀러 갔다가 승려들과 싸움을 벌여 의금부(義禁府)에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학생들을 단속하지 못한 교관들도 함께 의금부에 갇혔는데, 성균관 생원들이 스승을 풀어달라고 상소한 글에 “200명이나 되는 유생 가운데 어찌 이유를 만드는 자가 없겠습니까? 이제 유생 두어 사람이 스승을 속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유를 댄다면 어찌 그 진정(眞情)과 허위를 알고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거짓 이유를 만들어 스승을 속이고 휴가를 얻기도 했던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오늘날의 방학 같은 장기 휴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 재해로 흉년이 들었을 때는 일정 기간 유생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방학하는 경우가 있었다. 유생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성균관에 속한 학전(學田)과 노비에게서 조달하였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경비가 부족해서 성균관을 운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93) | 윤기, 앞의 책, 30∼31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