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의 교수법
훈장의 학력과 수준이 서당마다 격차가 크고 수준 낮은 훈장이 많아지다 보니 가르치는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잘 가르치지도 못하는 훈장들은 학생의 재능을 파악하여 실력이 늘도록 충실히 가르치고 이끌지 못하였다. 영조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낸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보니 향촌의 자제가 7∼8세에 입학하여 약관(20세)이 되도록 문리(文理)가 막연하고 경서를 떼지 못한다. 이런 자가 열 명 가운데 8∼9명이니 어찌 다 어둡고 미련한 자이겠는가. 나이 20세가 되었는데 …… 뭇 성현의 글을 만나면 입이 뻑뻑하여 읽지를 못하고, 관의 명령은 눈이 어두워 알지 못하고, 과거장에서는 글도 한 편 짓지 못하고, 편지나 고을의 소장에도 하고픈 말을 다하지 못한다. …… 이 까닭을 학부형도 모르고 스승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고 다만 재능이 없는 탓이라고 돌리니 …….
서당 교육을 받고 나서도 경서를 읽고 해석하기는커녕 실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글짓기조차 못하는 상황을 통탄한 것이다. 어당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세 번 반복하게 하더라도 꼭 학생에게 해석하게 할 것(훈장이 해석한 것을 무조건 암기시키지 말 것)’과 ‘정통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철저히 학습시키고 적당히 넘어가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서당의 교육이 암송 중심이라 해서 무조건적인 주입과 암기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문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풀어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당시 서당의 학습 내용이 특별한 규제가 없어 서당마다 차이가 심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