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기술과 주체
봉한 학설의 갑작스런 폐기에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에서 주체를 세우려는 북한 과학 기술자들과 사상가들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북한 과학 기술의 성과가 단지 비날론과 봉한 학설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정치·경제적 자립을 추구해 온 북한 정부는 과학 지식 및 기술 부문에서도 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일련의 정책을 펼쳤다. 외국과의 교류가 줄어들면서 최신 과학 기술 지식의 도입은 그만큼 더뎌졌지만, 북한 정부는 대중 동원을 통한 노동력의 집중 투입으로 기술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했다. 1960년대 북한 전역을 뜨겁게 달군 천리마 운동은 대중의 에너지를 모아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의 전형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 동안 북한 전역에는 폴리염화 비닐(PVC) 공장, 무연탄 가스화 공장, 제강소 등 많은 중공업 설비가 건설되었다. 일본군이나 일본 자본가가 버리고 간 공업 설비도 대부분 복구되었고, 여기에 새로운 공장이 증설되어 북한 경제를 일으키는 데 한몫했다. 북한 정부는 이 모두가 당의 자립 경제 건설 노선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과학 기술의 자립을 향한 움직임은 교육 부문에서도 일어났다. 1950년대까지 북한 과학은 소련 과학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으며, 과학 기술자 사회에서도 소련 유학파가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소련 유학파보다 국내파 과학 기술자의 목소리가 더 존중받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이론을 연구하는 이들보다는 공장이나 기업소에서 실제 산업 생산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의 권위가 높아졌다. 자립 경제 건설을 위한 과학 기술의 역할이 강조되다 보니 자연스레 이론 연구나 기초 연구보다는 응용 연구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학 기술자의 전문성보다는 ‘인민 대중의 집체적인 역량’이 더 강조되었다. 무모한 사업 추진에 제동을 걸려 했던 전문가들은 ‘기술 신비주의’에 젖어 있다는 호된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
전문가의 의견보다는 ‘대중의 창발성(創發性)’에 의지했던 북한의 과학 기술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웃나라 중국에서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추진하였던 대약진(大躍進) 운동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간 것을 생각하면, 북한의 이런 시도도 금세 실패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북한 과학 기술은 1960년대에 가장 풍성한 성과를 올렸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잠정적인 추측에 만족할 수밖에는 없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1960년대 북한 과학 기술의 성과를 자립 정책이 성공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기는 다소 어렵다. 이 시기에 북한 과학 기술을 짊어졌던 이들은 광복 후 북한에서 교육받고 길러진 인재들이 아니라, 바로 광복 전 일본에서 교육받은 월북 과학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 우리가 국외자(局外者)로서 바라보는 관점일 뿐이다. 1960년대 북한의 경제 건설은 나라 안팎에서 모두 높이 평가하는 성공적인 것이었다. 당시 북한은 제3세계 나라들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로까지 여겨지고 있었으니, 누가 그 성공을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또 국민 통합을 도모하는 마당에 누가 광복 전과 광복 후 세대의 기여를 나누어 생각하고자 했겠는가? 당시에 과학 기술이 거둔 성과를 북한 사람들이 자립 노선의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