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와 과학 기술
앞서 말했듯, 북한의 공식 문헌에서 주체라는 용어는 정치 분야에 앞서 과학 기술 분야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주체의 과학 기술’이 거둔 성공은 ‘사상의 주체’로, 나아가 ‘주체 사상’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체 사상은 북한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자신의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과학 기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립적 과학 기술의 성과에 힘입어 정식화된 주체 사상이 이제는 과학 기술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하는 상위의 가치 규범으로 웃자란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북한 과학자들은 스스로의 활동을 ‘주체 과학’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주체 과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과학 기술도 ‘수령의 향도(嚮導)’에 따라 발전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적 혁신 방식’, 즉 과학 기술의 혁신이 연구실이 아니라 근로 인민이 대거 유입된 생산 현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셋째 는 북한의 원료와 기술에 의거하여 북한 인민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자력갱생(自力更生)의 원칙’이다. 요컨대 주체 과학이란 북한의 자체 자원·기술·설비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모든 인민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북한의 실정에 가장 적합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과학을 말한다. 다른 나라(소련)의 과학 기술에 종속되지 않으려던 데서 출발한 과학 기술의 자립을 향한 움직임이, 어느새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북한식 과학 기술로 진화해 나간 것이다.
북한 과학 기술의 모든 분야는 스스로를 주체 과학·주체 기술·주체 의학·주체 농업 등의 이름에 걸맞게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북한의 모든 과학은 주체 과학이 되었고, 주체 과학이어야만 했다. 과학 기술자를 평가할 때도 전문성보다 사상성을 우선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진로를 배치할 적에도 실력이나 재능보다는 출신 성분·군 경력·현장 경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학술지에서 이론적 논문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대부분의 지면이 산업 현장에 곧장 응용될 수 있는 논문으로 채워졌다. 나아가 물리학 논문의 첫머리가 김일성의 교시로 시작하는 것도 흔한 일이 되었다. 과학 기술자는 왕왕 정치 및 노력 동원의 대상이 되었고, 공장과 기업소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과학자·기술자 돌격대를 조직하여 현장으로 달려 나가야 했다. 자력갱생에 초점을 맞춤에 따라 첨단 기술의 발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공장 대학’이 과학 기술자를 길러내는 주된 통로가 된 반면에 해외 유학이나 연수는 거의 중단되었다. 외국에 나가야 가치 있는 과학 기술을 익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사대주의나 교조주의의 산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체 과학의 이데올로기가 공고해질수록 성과에 대해 비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2·8 비날론 공장을 준공한 1961년 무렵 북한의 비날론 생산 기술은 세계를 선도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북한 과학 기술이 주체의 이름 아래 외부와 격리된 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세계의 화학 공업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유기 화합물의 기초 원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석탄과 석회석의 건류(乾溜)로부터 시작하는 북한의 비날론 생산 공정도 1970년대 후반 무렵에는 세계 화학 공업의 주류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한 과학 기술계로서는 비날론 설비를 증설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진 기술을 도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주체 과학의 최초이자 최대의 성과를 비판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의 화학 산업은 1960년대와 같은 눈부신 성과를 두 번 다시 내놓지 못했다. 주체 과학은 ‘바람직한 본보기’를 넘어 이미 하나의 물신(物神)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