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1. 머리치장

선비다운 품격의 상징, 갓

조선시대 남성들이 멋 내기에 가장 신경을 쓴 것은 갓이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사소절(士小節)』에서 갓을 쓸 때 주의할 점을 지적하였다. “첫째, 갓의 끈이 넓어서는 안 된다. 갓이 비록 낡았더라도 단정하게 쓰도록 해야 한다. 둘째, 망건은 머리를 거두기만 하면 되므로 바짝 졸라매서 이마에 눌린 자국이 있도록 해서는 안 되고, 느슨하게 매어 살쩍이 흐트러져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눈썹을 덮어 누르도록 해서도 안 되고 눈초리가 당겨 올라가도록 해서도 안 된다. 셋째, 선비가 비록 바쁘고 피곤하더라도 머리 위에는 잠시라도 갓이 없어서는 안 된다. 다만,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나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머리를 풀고 있는 자식은 갓이 없어도 좋다. 넷째, 갓을 푹 눌러쓰고 갓 밑에서 곁눈으로 남의 기색을 살피는 것은 바른 기상을 가진 자라면 할 짓이 아니다. 다섯째, 갓을 쓸 때는 갓을 젖혀 써서도 안 되고, 갓끈을 손으로 잡고 있어서도 안 되며 흐트러지게 해서도 안 된다. 또한, 갓끈이 귓등으로 지나가게 해서도 안 된다. 여섯째, 갓에 대로 만 든 갓끈을 다는 것은 시골에서는 무방하나 도시에서는 삼가는 것이 좋다. 복건에 갓을 덧쓰는 것은 편리한 점이 있으나 그런 모습으로 문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342)

갓은 갓의 높이와 양태(햇빛을 가리는 차양)의 나비에 따라 시대를 구별할 정도로 유행에 민감한 장신구였다. 조선시대 초기의 갓은 끝이 뾰족한 모양이었으나, 중기 이후부터는 갓의 머리 부분이 납작해지고 양태가 넓어지며 높이도 높아졌다. 사대부들의 큰 갓은 드나들 때 문에 닿아 몹시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정조시대 풍속화에서는 넓은 갓에 호박으로 만든 갓끈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선비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고종 때에 복식 간소화 법령 이후 매우 작아졌다.

<주립>   
대나무를 매우 곱게 잘라 갓을 만든 후 주칠(朱漆)을 한 주립은 조선시대 당상관이 융복에 착용하던 것이다. 갓 옆에는 호수를 꽂을 수 있는 장치가 붙어 있다.

갓은 색상에 따라 흑립(黑笠), 백립(白笠), 주립(朱笠)으로 나뉘며, 재료와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분류된다.

흑립은 평상시에 사용하는 검정색 갓으로, 대나무나 말총으로 갓의 몸체를 만들고 그 위에 비단이나 무명 등으로 싼 후 검정색 옻칠을 한 것이다. 백립은 상중(喪中)에 쓰는 갓으로, 대나무로 갓 틀을 만든 뒤 흰색 베를 입힌 것이다. 주립은 붉은색 갓으로, 갓 모양을 만든 후 붉은 옷칠을 한 것이다. 주립은 조선시대 문무 당상관이 융복(戎服)인 철릭을 입을 때 착용한 것이다. 주립에는 호랑이 수염 장식인 호수(虎鬚)를 꽂고 색깔이 있는 구슬로 만든 갓끈을 단다. 현종은 온천에 거둥할 때 보리 풍년이 크게 든 것을 매우 기뻐하여 수행하는 신하들에게 보리 이삭을 꽂아 풍년을 기념하게 하였고, 그 후 영조 때에는 가난하여 호수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보리 이삭으로 대신한다고 하였다.343)

<호수>   
호랑이 수염을 보리 이삭 모양으로 세죽(細竹) 틀에 꽂아 주립의 네 귀에 장식으로 꽂던 것이다.

남성들의 갓 호사는 갓을 만드는 재료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턱 아래에서 묶어 갓을 머리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갓끈(笠纓)은 실용적인 목적의 직물로 된 것과 장식용으로 나뉜다. 장식용 갓끈은 신분에 따라 재료가 정해져 있다. 1품에서 3품까지는 금이나 옥을 사용하였으며,344) 1502년(연산군 8)에는 산호, 유리, 명박의 사용을 금하였다. 1522년(중종 17)에는 마노, 호박, 산호, 청금석의 갓끈은 당상관 이외에는 일절 금한 기록이 있다.345) 흥선 대원군 집정 때는 의관문물(衣冠文物)의 간소화 시책에 따라 대나무를 사용하도록 하여 대로 만든 갓끈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사인시음(士人詩吟)>   
선비들이 시를 짓고 책을 읽고 시상을 가다듬는 장면을 묘사한 강희언(姜熙彦, 1710∼?)의 그림이다. 선비들은 복건, 흑립 등 각기 다른 관모를 쓰고 있다.

조선 후기 풍속화에 등장하는 선비를 보면 긴 갓끈에 담뱃대와 갓의 크기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들의 여유로운 모습에서 떠나 정치·경제·문화가 어우러진 이상향을 즐기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후 의복의 간소화가 이루어진 대한제국 때 고위 관리의 모습에서 작아진 갓에 갓끈이 짧아졌지만, 산업 시대로 들어서는 활발해진 느낌이 전해진다.

입식(笠飾)은 또 어떠한가? 갓 장식을 정자(頂子)라고 하는데, 중국의 원나라 때 처음 시작되었으며, 정자의 모양에 따라 관리들의 신분을 구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367년(공민왕 16)부터 신분에 따라 검정색 갓에 수정으로 만든 정자를 달도록 하였고,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대군은 금정자, 정3품 이상은 은정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관찰사·절도사는 옥정자, 감찰은 수정 정자를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 때 왕이 대신들의 정자를 없애려고 한 일이 있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 의하 면 전·현직 대신이 의식 때 입는 융복과 군복(軍服)에 옥로(玉鷺)를 하며, 외국으로 나가는 사신들도 착용하였다고 한다. 옥정자는 형태가 다양하며, 옥으로 해오라기(白鷺)를 조각한 것을 옥로 정자(玉鷺頂子)라고 한다. 해오라기는 청백리의 상징이다. 해오라기가 날갯짓하는 자태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과 덕으로 포용하는 리더십이라고 하여 이상적인 선비상으로 여겼다.346)

<대한제국시대의 관리>   
1900년 통상 예복인 두루마기에 답호를 덧입은 대한제국시대 관리이다. 갓이 좁아져 간편하게 보이며 활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고 하는 옛시조에서도 청백리의 상징으로서 해오라기를 언급한 것을 알 수 있다. 옥로 정자는 보통 높이 3∼4㎝가량의 작은 크기에 해오라기 한 마리를 깎거나 연꽃 사이에 서 있는 해오라기를 새기기도 한다. 옥로 정자 받침에는 바늘구멍을 내 갓 머리에 고정할 수 있게 하였다. 작은 정자에는 연못과 해오라기를 새기고, 나아가 이상적인 선비 정신까지 구현하는 선인들의 멋과 솜씨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필자] 송미경
342)이덕무, 『사소절』 : 조성기 지음, 『양반 가문의 쓴 소리』, 김영사, 2006, 194∼196쪽 재인용.
343)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지13, 정교전고.
344)『경국대전』 권3, 예전, 의장조.
345)『중종실록』 권45, 중종 17년 8월 을유.
346)장숙환, 앞의 책, 76∼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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