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1. 머리치장

잠재운 피어싱의 열망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남자들이 반드시 귀를 뚫어 귀고리를 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으니, 이후부터는 모두 이러한 오랑캐의 습속을 엄하게 고칠 것이며, 한양은 이달까지 고치게 하며, 혹시라도 시행하지 않는 사람은 사헌부에서 엄하게 벌하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349) 이로 미루어 1572년(선조 5) 당시에는 나이를 불문하고 남자들이 귀고리를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평양 지방의 혼인>   
화관을 쓴 신부는 큰 귀고리를 하고 있다. 고이댕기라는 다른 지방과 구별되는 댕기를 하였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도 “우리나라 풍속에 남녀가 어릴 때에 귀를 뚫어 귀고리를 달아서 오랑캐 풍속과 비슷하였는데, 이것은 전해 온 지가 오래되어 고치려고 하지 않았지만, 금상(今上) 초년에 오랑캐 풍속을 고쳐야 한다는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귀천(貴賤) 간에 아이를 낳으면 모두 귀를 뚫지 않았는데 오직 여자아이는 혹 모양 그대로 귀고리를 하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50)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사대부 계층에서 혼례 때 귓불에 거는 형태의 귀고리를 하였고, 송도와 평안도, 황해도 지방에서는 하류 계급에서 귓불을 뚫은 작은 구리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고 실려 있다. 그리고 귀고리 착용이 유교 사상에 어긋나고 중국 사람들의 놀림을 받기 때문에 금한다고 하였다. 또한, 귀고리는 고려 때 몽고의 풍습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351) 그렇지만 대부분의 풍속화가 영·정조 이후에 그려져 귀고리를 착용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귀고리>   
조선시대의 귀고리는 귀를 뚫지 않고 테를 따로 만들어 귓바퀴에 걸었고, 테 아래에 붉은 실이나 매듭으로 장식을 하였다. 사진은 붉은 명주실로 수술과 고리를 만들고 은칠보로 방울을 만들어 달았다.

귀고리에는 귀를 뚫어 착용하거나 귀에 꼭 맞게 끼는 것과 귀에 거는 것 두 종류가 있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유물은 대부분 조선 후기의 귀고리로, 처음 보면 괴이하기까지 하다. 귀 모양 또는 둥근 모양의 철사와 같은 금속 고리가 있고, 그 아래에 붉은 실이나 매듭 장식이 있다. 이 귀고리들은 주로 평양 지방의 혼인 때 주로 사용되었으며, 개성 지방의 혼인 때도 사용되었다.352)

[필자] 송미경
349)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지13, 정교전고.
350)『대동야승』 지55, 문운만록(聞韻漫錄).
351)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이당변증설.
352)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 『북한 지방의 전통 복식』, 현암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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