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 사상의 발달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여 ‘중대(654∼780)’가 시작되면서 신라 왕실은 지방 제도 정비와 중앙 제도 개편으로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 집권적인 관료 체제를 유지해 갔다. 이들 체제를 운영하는 이념으로 유교가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유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왕의 이름도 불교식에서 시호(諡號)로 바뀌었다. 중대 왕실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후 사회 구조의 재편성을 시도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불교계의 제도적인 개편으로 성전 사원(成典寺院)이 승정(僧政) 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111) 이러한 정치적·제도적 변화와 유학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어 가는 사상계의 동향에 상응하여 삼국의 불교를 종합하고 중국 불교의 새로운 경향을 이해하여 다양하고 폭넓은 불교 사상을 담아낼 새로운 불교 사상 체계를 확립하고 기층민들에게까지 널리 불교를 이해 전파시키는 것이 불교계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통일기 신라 일반민들은 의식이 성장하면서 보살 사상에 입각한 보살계(菩薩戒)와 불성론(佛性論) 수용으로 인간의 본질적 평등성을 주장하는 인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업설(業說)과 윤회 사상이 현실의 신분 차별을 완고하게 지지하고 있었지만 불교 교리의 이해에 따른 평등관의 수용은 의식의 새로운 변화였다.112)
중국의 남북조 불교는 부처가 깨달은 연기(緣起)의 정수가 중도(中道)이며 공(空)이라는 논리를 체계화한 중관(中觀) 계통의 사상과 삼라만상을 인식 작용과 인식의 대상인 현상 세계와의 관계로 파악하는 유식(唯識) 계통의 사상 연구가 심화되었으며, 모든 중생이 여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도 연구 경향의 한 축을 이루었다. 6세기 말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남북조 불교의 성과를 종합한 위에서 이론적인 교학과 실천적인 관행을 체계화한 지의(智顗)의 천태종(天台宗)이 일어나 종파 불교의 장을 열었다. 618년 당나라가 개창된 이후에는 현장(玄奘)이 소개한 신유식을 바탕으로 법상종(法相宗)이 형성되었고, 법상종에 대한 대응으로 남북조의 유식 사상을 계승하여 법장(法藏)은 화엄종(華嚴宗)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중국 불교의 동향은 신라 불교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삼국기 신라 불교의 중심을 이루었던 유식 교학의 기반 위에 고구려나 백제에서 발달한 삼론학(三論學)이나 열반학(涅槃學)이 수용됨으로써 통일 기 신라 불교는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고, 신유식과 화엄과 같은 중국의 신불교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원측, 원효, 의상 등의 활동을 중심으로 신라 불교 교학은 독자적인 꽃을 피우며 크게 발전하였고, 특히 유식과 화엄이 주축을 이루었다. 한편으로는 국가와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성장하였던 국가 불교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이 시기에 성장하던 기층민의 신앙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어 미타 신앙과 관음 신앙 등이 성행하였다.
삼국기부터 교학의 중심을 이루었던 유식 사상은 신유식이 신라에 전해지면서 여러 학승의 왕성한 연구가 이어져 통일신라 교학의 가장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다. 유식 사상은 미륵과 미타 및 지장 신앙을 배경으로 법상종을 열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삼국시대에 수용된 화엄은 통일신라시대에 의상이 화엄종을 개설하여 신라 교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신라 불교 초기부터 저변에 기반을 두고 있던 밀교적 면모는 통일기를 지나면서 국가적 활동을 통해 기반을 쌓았고, 8세기에 중국 신밀교의 정립과 나란히 밀교 조사로서 널리 활동한 현초나 혜초 같은 승려를 배출하기도 하였다.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