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불교 사상의 확립과 일상의 신앙생활1. 불교 사상의 발달

화엄 사상

화엄(華嚴)은 『화엄경』이 최고 진리를 설한 것이라고 보아 종래의 여러 사상을 종합하여 화엄이 최고의 원만한 가르침(圓敎)임을 강조한다. 화엄의 교리적 특징은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 지어 있다는 연기설(緣起說)에 있다. 그 연기는 서로가 걸림 없이 통하고(相卽相入) 서로서로 거듭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重重無盡) 것으로서, 어떠한 일에도 걸림이 없는 세계인 법계(法界)라 한다.

통일신라 화엄 사상을 주도한 것은 의상(義相, 625∼702)이었다. 의상은 삼국 간의 쟁패전이 열기를 더해 가던 진평왕 말년에 진골 귀족의 후예로 태어났다. 스무 살 전후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여 당시 신라에 소개되었던 섭론·지론 등의 교학 탐구에 열중하던 의상은 현장이 인도에서 들여온 신유식을 배우고자 선배인 원효와 함께 650년에 중국 유학길에 올 랐다. 육로를 통해 중국에 들어가고자 하던 이들의 일차 행로는 고구려 국경에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661년에 다시 중국 유학길에 나선 의상은 바닷길을 통해 당나라로 건너갔다.

<황복사지 전경>   
의상이 출가하고 당나라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활동했던 경주 황복사의 터이다. 효소왕(재위 692∼702)이 전왕인 신문왕을 위해 탑을 세우고, 다음 성덕왕(재위 702∼737)은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어 불상 등을 이 탑 안에 봉안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간 의상은 그동안 신라에서 익혔던 지론을 더욱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나서 장안 남방의 종남산에서 당대의 교학을 집대성하여 새로이 화엄을 정립해 가던 지엄(智儼)의 문하에 나아가 화엄을 배웠다. 의상은 지엄 화엄의 정수를 체득하고 668년에 이를 체계화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저술하였다. 그는 화엄일승 법계연기의 핵심을 언어의 절제하에 210자의 법계도시(法界圖詩)로 엮고, 이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법계도인(法界圖印)을 만들어 그 내용을 『일승법계도』로 정리함으로써 화엄일승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그 형식도 구불구불 돌아가는 반시(盤詩) 형태의 법계도에 핵심을 집약시켜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상징적인 효과를 의도하였고, 최신 기술이던 목판 인쇄에 다라니(陀羅尼)를 강조하여 담아 냈다. 다라니는 모든 법을 갖춘 상징이면서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670년(문무왕 10)에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의상은 신라에서 화엄 사상을 펴나갈 전법 도량을 물색하면서 시대적 과제를 깊이 통찰하였다. 이 시기 원효는 유식과 중관을 화회하여 새로운 철학 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대중 교화를 통해 민중을 정토 신앙으로 포용하고 있었다. 이즈음의 일로 전승된 설화가 낙산(洛山) 관음이다. 의상은 동해변 낙산의 굴 안에 관음 진신이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정진한 끝에 관음 진신을 친견하 였다. 674년에 황복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였던 의상은 676년에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화엄 근본 도량을 이루었다. 신라는 같은 해 11월에 당군을 격파하여 통일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부석사 전경>   
의상이 676년(문무왕 16)에 창건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수행하던 신라 화엄의 으뜸 사찰이다. 부석은 선묘(善妙) 설화가 얽혀 있는, 무량수전 서쪽의 큰 바위이다. 의상이 이곳에 절을 지으려 하자 산적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의상을 사모하여 용이 된 선묘가 나타나 번갯불을 일으키고 봉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 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아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 부석>   

통일 이후 신라 사회는 새롭게 확보한 국토와 국민을 새로운 토대에서 하나로 이끌어갈 화합과 안정이 절실하였다.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681년에 도성을 새롭게 쌓고자 하였다. 이에 의상은 왕의 정치가 바르기만 하면 풀로 언덕을 만들어 경계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으려 하지 않는다는 비유를 들어 강력하게 축성 중지를 건의하고 관철시켰다. 의상은 또한 청정한 수도자의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의상은 비구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지물인 승복 세 가지와 발우 하나, 곧 삼의일발(三衣一鉢) 이외에는 어떤 소유물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국왕이 토지와 노비를 주고자 하였을 때도 불법은 평등하여 귀하고 천한 사람이 함께 이루어 간다며 받지 않았다.

의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 종단을 이끌었는데, 그 이념은 화엄 사상의 평등과 조화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신분에 따라 구분되 는 골품제 사회였다. 의상은 화엄 종단 내에서 모든 문도에게 평등한 종단 운영을 실현하고자 하여 진정(眞定)이나 지통(智通) 같은 기층민 출신 제자를 포용하고, 그들의 활동을 한껏 보장함으로써 분명한 성과를 이루었다.

의상 화엄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일(一)과 다(多)의 상입상즉(相入相卽)으로 설명되는 법계연기는 평등과 조화의 논리로서 의상의 화엄 교단에서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어 실천되었던 것이다.124)

돈독한 수행으로 교단을 이끌던 의상은 702년(효소왕 11)에 78세로 입적하였다. 넉 달 뒤에 성덕왕이 즉위하여 바야흐로 중대의 황금기를 열어 나갈 시기였다.

<법계도인>   
의상이 화엄 사상의 정수를 210자의 법계도시로 엮고, 이를 구불구불한 그림으로 만든 도인이다. 고려 대장경 판본 『법계도기총수록』 권상(卷上)에 실린 것이다.

의상 화엄 사상의 정수인 『일승법계도』는 화엄 법계연기설의 핵심으로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말하는 상입상즉의 연기법이 핵심을 이룬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一中多) 전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多中一), 하나가 곧 전체요(一卽多) 전체가 곧 하나(多卽一)라는 것이 그것이다. 의상은 이를 동전 열 개를 세는 수십전(數十錢)의 비유로 풀이하였다. 그리고 법계연기의 범주를 하나와 전체의 상입상즉, 조그만 티끌과 광대한 시방세계, 한순간과 무한한 시간, 처음 마음을 내는 것(初發心)과 궁극의 깨달음, 그리고 생사와 열반으로 이루어진 다라니 이용(理用)·사(事)·세시(世時)·위(位)의 네 가지로 구성하였다. 의상은 이를 자리행(自利行)으로 보고, 여기에 이타행(利他行)과 수행(修行)을 추가하여 강한 실천적 성격의 사상 체계를 제시하였다.125)

의상이 중(中)과 즉(卽)의 이론으로 파악한 법계연기론은 다양한 현상 세계와 동일한 이치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하나와 전체가 같은 자격으로 서로 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서만 상대를 인정하여 성립할 수 있 다는 법계연기의 논리는 개체 간의 절대 평등을 의미한다. 상입상즉의 연기설은 전체 구성원의 평등과 조화를 의미하는 이론이었다.

의상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과 깨달은 부처처럼 전혀 다른 두 입장을 융합한 상태의 중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두 입장으로 대표되는 모든 상대법이 각자의 형식을 지니면서 그대로 중도임을 말한다. 의상이 말하는 중도는 양변을 모두 인정하면서, 그 융합으로서의 중도도 인정한다. 양변과 중도의 구도를 통해 중생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대로 성불할 수 있다는 본래성불을 말하는 것이다.

의상의 『일승법계도』에서 중시하는 법성의 원융은 존재 그 자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인 해인 삼매(海印三昧)에서만 체득되는 경지로서 이것이 성기(性起)이다.126) 이 깨달음의 경지, 즉 드러난 존재 그 자체로부터 일체 사물이 유출되어 나오는 것이 연기이다. 지엄은 법계연기의 순정한 면이 성기임을 말하였다. 연기와 성기는 포괄 개념이다. 『일승법계도』 자체에는 성기라는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의상의 견해를 담고 있다고 평가되는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에는 성기에 관한 많은 해설이 나온다. 성기설을 포괄하는 법계연기설이 의상이 전개한 연기관인 것이다.

의상은 십현설(十玄說) 등에서 지엄의 학설을 계승하였으나, 수십전설(數十錢說)과 육상설(六相說)을 연기설의 중요한 교의로 정착시키는 독자적인 관점을 보였다. 그는 또 일반 화엄학과는 달리 이의 차별을 인정하는 견해 위에서 이이상즉설(理理相卽說)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중도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의상의 화엄 사상은 실천행을 중시하였고, 이는 사상과 문도 형성으로 이룩한 화엄 종단에서 신앙으로 실천되었다. 『화엄경』에 토대를 둔 구도적인 관음 신앙과, 서방정토를 본체로 삼는 아미타불이 이 땅에서 중생을 정토로 이끈다는 미타 신앙을 실천한 의상의 화엄 교단은, 통일기 신라 사회가 지향하던 사회 안정을 선도하는 것이었다.127)

의상의 원융한 화엄 사상을 일심에 의하여 우주의 만상을 통섭하려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전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압 집권적 통치 체제를 뒷받침하기에 적당하다고 보기도 한다.128) 국민과 국왕을 다(多)와 일(一)의 관계로 보고 화엄의 원융 사상이 국민을 국왕 중심으로 통합시키는 이념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승법계도』에서의 일은 하나와 전체의 상입상즉한 관계 속에서의 일이지 어떤 절대적 개별체가 아니며, 우주의 일체 만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동시에 그 하나 역시 일체 만상에로 융합되므로 오히려 조화와 평등이 강조되는 이론으로 해석된다. 중국 법장의 화엄 사상이 당나라의 절대주의 체제 이념이었다는 관점에서 시작된 왕권 이념설은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므로 일반적인 당위성을 가질 수 없다.129) 따라서 화엄의 원융 사상과 유심 사상 자체를 전제 왕권의 이념으로 간주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의상 외에 원효나 명효·표원 그리고 의상의 제자들이 일과 다에 대한 논의를 하였지만, 종교의 본질적 이념 구현에 충실하였지 화엄 사상을 현실적·정치적으로 해석한 경우는 없다.

의상은 저술을 많이 하지 않고 법계도시나 발원문 같은 짧은 게송(偈頌)을 남겼다. 의상의 관심이 일반 대중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논리적인 설명이나 많은 분량의 글보다는 간단한 시구(詩句)로 이들에게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의상의 활동은 화엄 교단을 열어 문도에게 지속적으로 화엄 교학과 정토 신앙의 실천을 이어나가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의상은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부석사와 태백산·소백산 등지에서 여러 제자에게 화엄 사상을 강의하여 신라 화엄 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제자들은 강의를 묶어 책으로 엮기도 하였으니, 『추동기(錐洞記)』나 『도신장(道身章)』이 그것이다. 그동안 법장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던 『화엄경문답』도 그중의 하나로 추측되고 있다.

의상의 대표적인 제자는 십대 제자로 불리는 오진·지통·표훈·진 정·진장·도융·양원·상원·능인·범체·도신인데, 이들의 활동 시기는 일부 뒤섞여 있다. 표훈(表訓)은 의상의 지도에 따라 새로운 교의 해석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경덕왕대에 주로 활동했던 연대를 고려하여 의상의 손제자로 보기도 한다. 진정(眞定)은 기층민 출신으로 문하의 사상을 주도하던 제자이다. 지통(智通, 655∼?)은 노비로서 어려서 낭지에게 출가하였다가 의상의 문하로 옮겨서 화엄을 깨치고 관행을 닦던 수행인으로 스승의 강의를 기록한 『추동기』(또는 요의문답) 2권을 지었다. 도신(道身)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도신장』(또는 일승문답) 2권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의상과 지엄이나 제자들의 문답과 학설들이 실려 있다. 상원(常元)은 의상 문하의 강의에서 많은 문답을 남겼고 양원(良圓)은 『일승법계도』에 주석을 남겼다. 다시 이들을 이어 신림(神琳)과 법융(法融) 등이 의상의 화엄 전통을 널리 계승하여 왕성한 흐름을 이루었다.130)

<『추혈기』>   
의상의 제자들이 스승의 강의를 편집하여 만든 책이다. 지통은 『추혈기』를, 도신은 『도신장』을 엮었다. 고려 대장경 판본 『법계도기총수록』 권하(卷下)에 실린 것이다.
<『도신장』>   

의상과 그를 계승하는 문도들은 당시 불교계에서 크게 중시되던 『기신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이를 깎아 내리는 경향도 있었다. 이는 『기신론』의 교설이 의상계의 근본 사상인 구체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봄으로써 자기화하는 무주(無住)의 강조나, 오척신(五尺身) 곧 이 몸 그대로의 성불론 주장 등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의상계에서는 오직 『화엄경』만을 특화하여 연구하였던 것이다.

의상의 직계 제자들이 신라 화엄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들과 사상 내용을 달리하는 흐름도 다양하게 파악된다. 우선 의상을 계승한 주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로 구분된다. 의상계 내에서도 부석사계, 표훈계, 해인사계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비주류는 원효와 법장의 융합에 따른 화엄과 기신의 융합인 원효계, 오대산·지리산·천관산 등 다른 화엄 경향을 보였던 계통, 또는 황룡사계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 밖에 법장의 제자인 승전(勝詮)은 690년대에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법장이 의상에게 보내는 서신과 법장의 화엄 사상을 집약한 『화엄경』 해석서인 『탐현기(探玄記)』 등의 저술을 가져왔다. 심상(審祥, ?∼742) 역시 법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 화엄종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의상을 계승하는 화엄 종단에서 전국 곳곳에 큰 사찰(傳敎十刹)을 건립한 것은 화엄의 성세를 대변한다. 부석사·화엄사·해인사·범어사·옥천사·비마라사·미리사·보광사·보원사·갑사·화산사·국신사·청담사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사상 경향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해인사(海印寺)에서는 의상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활동 경향을 보였다. 현준(賢俊)과 결언(決言)은 884년에 중국 화엄종을 정립한 지엄을 추모하는 보은 결사를 조직하였고, 886년에는 헌강왕의 명복을 비는 『화엄경』 결사를 조직하였다. 결언은 861년에 경문왕의 초청으로 곡사에서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강의를 하였으며, 화엄 사상의 핵심 저술로 법장이 지은 『교분기(敎分記)』를 강의하였다. 895년에 해인사는 도적의 침입을 받아 승군을 조직하여 사원을 보호하였는데, 승훈이 이 일을 주도하였다. 최치원(崔致遠)도 만년에 해인사에 머물며 법장의 덕을 기리는 일을 주도하였다.

화엄사를 대찰로 경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기(緣起)는 754년(경덕왕 13)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화엄 사경을 주도하였는데, 『개종결의(開宗決疑)』·『화엄경요결』·『진류환원락도(眞流還源樂圖)』와 함께 『기신론』 관계 저술을 남겨 원효 계통의 사상과 연관된 면모를 보였다. 화엄사에서는 이 밖에도 정행·정현·영관 등이 활동하였다.

<화엄사 전경>   
흑백 사진은 1930년대에 촬영한 것이다.
<화엄사 전경>   
화엄사는 8세기 중반에 화엄의 대찰로 이룩되어 의상과는 다소 다른 전통의 화엄 사상을 열었다.

황룡사에서는 754년에 법해(法海)가 활동하였으며, 원성왕대에는 지해(智海)가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759년경에 보림사를 창건한 원표(元表)는 천관보살 신앙을 지녔던 화엄 행자였으며, 787년(원성왕 3)에 승관직인 소년서성을 지낸 범여(梵如)는 『화엄경요결』 6권을 지었고, 범수(梵修)는 799년(소성왕 1)에 80화엄을 중심으로 화엄 사상을 재정립한 징관의 『화엄경소』를 강의하였다.

의상의 화엄과 다른 사상을 보여 주는 자료들도 한 부류를 이룬다. 8세기 중반에 활동한 황룡사의 표원(表員)은 화엄 사상의 중요 과제에 대한 제 학설을 집대성하여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訣問答)』을 편찬하였다. 표원은 『화엄경』의 구조와 설한 시기 등의 문제, 화엄 교설의 중심 사상인 육상·수십전유·연기·탐현·보법 등의 문제, 대승보살의 수행도 문제 등을 18분야로 묶어 설명하였다. 표원은 80화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법계연기의 근원을 밝히고 각종 법계와 역대 교판을 두루 이해하였는데, 신 라 화엄학의 주류인 의상의 사상을 위주로 하지 않고 법장의 사상을 토대로 하면서 원효와 혜원·안름 등의 학설을 집중적으로 인용하였다. 법장과 원효의 사상을 융합한 표원은 의상계가 아닌 원효계 화엄 학승이었으며, 이처럼 원효와 법장의 사상을 융합한 형태가 표원에서 견등으로 계승되었다.131)

<화엄사 화엄 석경(石經)>   
『화엄경』의 원문을 엷은 청색의 돌판에 새긴 것이다. 677년(문무왕 17)에 의상이 왕명을 받아 화엄사에 각황전을 세우고 이곳에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파손되었다. 비록 9,000여 점의 파편으로 남아 있으나 우리나라 화엄종 사찰의 상징적 유물이다.
<해인사 전경>   
9세기에 신라 화엄의 중심 사찰이 되었던 해인사이다. 해인사에서는 의상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활동 경향을 보였다.
<해인사 전경>   
흑백 사진은 1930년대에 촬영한 것이다.

명효(明皛)는 『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을 저술하였는데 형식상 의상의 법계도인과 같은 상징적 형상을 취하고 있으나 『기신론』과 상통하는 해석을 보였다. 이로 보아 명효는 의상 사상의 계승자가 아니라 화엄과 기신을 동일한 경계로 보았던 원효 계통에 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법계도인과 『해인삼매론』은 둘 다 모두 상징적인 도인 형태를 사용하여 성불을 지향한 것은 동일하지만, 내용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다.

견등(見登)은 화엄 사상의 성불의를 밝힌 『화엄일승성불묘의(華嚴一乘成佛妙義)』와 『기신론동이약집(起信論同異略集)』을 저술하였다. 견등은 법장의 저술을 집중적으 로 인용하며, 삼승 유가교의 경계와는 판연히 다른 화엄의 성불의를 해석하며 원효와 법장의 사상을 융합 수용하였다.

<『법계도기총수록』>   
신라 화엄의 근본이 되었던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후학들이 주석을 베푼 법계도기들을 모아 고려 후반에 편찬한 책이다. ‘일중일체’ 부분에 대해 법기·진기·대기의 차례로 법계도기를 싣고, 한 칸씩 내려서 『도신장』 등 참고 문헌을 인용한 체제로 엮었다. 고려 대장경 판본이다.

후삼국 시기에 해인사에는 두 계통의 화엄 학풍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는 희랑(希朗)으로 왕건을 지지하였고, 다른 하나는 관혜(觀惠)로 견훤을 지지하였다. 희랑은 의상계 화엄학의 정통을 주도하던 태백산 부석사 학풍을 계승하여 북악(北岳)이라 불렸고, 관혜는 지리산 화엄사 학풍을 계승하여 남악(南岳)으로 불렸다. 각기 독자적인 활동을 보이던 이들 두 학풍은 고려 초에 북악 출신 균여(均如)에 의해 통합되었다.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은 의상계 화엄 사상이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전승되던 사실을 알려 주며, 그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을 제공해 준다. 고려 중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책은 두 차례에 걸쳐 편집되었다. 처음에 신라 말의 대기(大記)와 법기(法記)와 진기(眞記)의 주석서를 모으고, 다시 이에 부수적인 보충 자료를 추가하여 두 번째 편집이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구성이 되었다. 균여는 초기 화엄의 완성자인 지엄과 의상과 법장의 저술에 대한 방대한 해석서를 짓고 선학들의 의기에 나타난 교의를 재정립하였다. 신라 말의 선종 수용기를 지나면서 선종의 비판에 위축된 화엄 사상의 재정립에 역점을 둔 균여의 화엄 사상은 『법계도기총수록』 등에 나타나는 신라 화엄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132)

[필자] 정병삼
124)정병삼, 『의상 화엄 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141∼153쪽.
125)의상(義相),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 『한국 불교 전서』 2─2하∼4상.
126)전해주, 『의상(義湘) 화엄 사상사 연구』, 민족사, 1993, 148쪽.
127)정병삼, 「의상의 화엄 사상과 통일기 신라 사회」, 『불교학연구』 1, 불교학연구회, 2000, 67∼73쪽.
128)김두진, 『의상(義湘)─그의 생애와 화엄 사상─』, 민음사, 1995, 374쪽.
129)남동신, 「의상 화엄사상의 역사적 이해」, 『역사와 현실』 20, 한국역사연구회, 1996, 47∼58쪽.
130)김상현, 『신라 화엄 사상사 연구』, 민족사, 1991, 53∼84쪽.
131)고익진, 앞의 책, 362쪽.
132)김상현, 앞의 책, 3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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