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연등회와 팔관회

고려의 대표적 불교 의례로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꼽을 수 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이미 설행된 적이 있는데 고려 태조는 이러한 전례를 수용하여 상원연등회(上元燃燈會)와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를 국가 행사로 법제화하고 훈요 10조를 통해 항례적으로 설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두 행사는 성종대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잠시 중단되었으나 현종 즉위 후 다시 설행되었다. 성종대의 일시적인 금지 조치는 최승로(崔承老)를 비롯한 유학자와 관료들이 몸을 닦는 도로서의 불교와 나라를 다스리는 도로서의 유교의 역할을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관리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란과 전쟁을 하면서 연등회와 팔관회 설행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팔관회와 연등회 설행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고려사』 길례(吉禮) 잡의조(雜儀條)에 있다. 두 행사는 선왕이나 왕비의 기일(忌日)과 겹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개설 일자를 바꾸는 일이 없었고, 또 대몽 항쟁기에 수도를 강화로 옮겼다가 개경으로 환도하는 과정에서도 격식에 맞게 행사를 설행하기 위한 공간을 우선적으로 마련할 정도로 고려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 한 국가 의례이자 국가적 불교 신앙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중요한 행사가 잡의로 구분된 것은 유교적 관점에 입각하여 『고려사』를 서술한 조선 전기 학자들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상원연등회는 2월 14일과 15일 양일간에 걸쳐 행사가 진행되었다. 원래 불교에서는 연등공양을 중요한 공양법이자 복을 쌓은 공덕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고려에서는 연등회 기간 동안 관리에게 사흘 동안 휴가를 주었고, 연등도감(燃燈都監)을 설치하여 연등회 행사를 총지휘하며 다른 국가 기관과 함께 연등회를 준비하였다. 이렇게 장기 휴가가 법으로 정해져 있는 점과 아울러 연등회를 총괄하는 임시 기관인 도감이 설치된 것은 연등회가 고려에서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상>   
개성에 있는 태조 왕건의 능(현릉)에서 출토된 좌상인데, 원래는 비단 의복을 입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의 제사를 지냈던 봉은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이 개창된 후 경기도 마전현의 작은 사찰로 옮겨졌다가 유교적 제례법에 따라 동상을 목주(木主, 위패)로 바꾸라는 왕명으로 1429년(세종 11) 출토 지점에 매장되었다.

연등회는 궁궐의 강안전과 봉은사 두 곳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중에서 연등회 자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봉은사 태조 진전에 왕이 친히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다.210) 봉은사에 왕이 직접 행차하여 태조의 영정에 향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일은 고려 상원연등회의 특징이었다. 고려에서는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태조의 위업이 재인식되었는데, 태조는 국민을 단합시킬 뿐만 아니라 왕의 권위에도 힘을 실어 주는 존재였다. 봉은사에 행차하여 태조 진전에 재를 올리는 의식은 고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태조에 대한 신앙을 연등회에 중요한 요소로 포함시킨 것으로, 이를 통해 연등회 행사 자체는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태조 진전에서의 행향이 끝나면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이 연회를 통해 왕과 신하 간의 상하 위계와 질서를 확인하고 군신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다져 나갔다. 특히, 관등놀이를 하는 등석연(燈夕宴)은 연등회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정례적인 상원연등회와 4월 초파일 연등회 외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에도 연등회를 개최하였다. 그 예로는 1067년(문종 21) 정월에 흥왕사 창건을 축하하기 위하여 닷새 동안 밤낮으로 화려하게 개설한 특별 연등회, 1073년(문종 27) 2월에 봉은사에 새로 안치한 불상을 찬송하기 위해 봉은사에서 개최한 연등회를 들 수 있다. 다만 국상(國喪), 외적의 침입, 화재 같은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의식을 간소하게 진행하였다.

<관경 십육관변상도 부분>   
1323년(충숙왕 10)에 그린 관경 십육관변상도의 부분이다. 정토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天人)들을 묘사하였다. 일본 인송사(隣松寺)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시대 연등회와 팔관회의 연회에서는 아마도 이런 악기들이 연주되었을 것이다.

연등회가 부처를 섬기는 순수한 불교적 성격이 강하였다면 하늘의 신령,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함께 섬기는 팔관회는 전통 신앙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팔관회는 대내외적인 성격을 통해 볼 때 고려의 국가 의례 중에서도 비중이 큰 행사였다. 연등회는 국기(國忌) 등의 이유로 설행 일자를 변경하기도 하였으나 팔관회는 국상(國喪)이 있을 경우 연희적(演戲的) 요소를 축소할 뿐 언제나 11월 보름에 변함없이 개최되었다. 연등회가 불교 의례이면서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축제적인 성격이 강하였다면 팔관회는 무엇보다도 국왕의 권위와 고려의 위상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국가 의례의 성격이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팔관회는 인도의 팔계재(八戒齋)가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전래되어 팔관재(八關齋)로 바뀐 것을 신라시대에 수용한 것이며, 후고구려에서는 고구려의 제천 행사인 10월 동맹제(東盟祭)를 계승하여 농경의례적 계절 축제의 성격을 더하였다. 태조 왕건은 흩어진 민심과 지방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는데, 국가 의례인 팔관회를 통해 불교의 테두리 안에서 토착 신앙을 국가적으로 종합하였다.211)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적 연계망을 형성하고 각 지역의 제사를 중앙에서 종합적으로 개최하였다는 점과, 하표(賀表)를 가진 신하들이 그 지역을 대표해서 참가하였다는 점에 서 전국적인 성격을 띤 국가 의례였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하여 팔관회에서는 국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 연회가 가장 중요하였다.

<의봉문터>   
원래 이름은 신봉문(神鳳門)이었다. 고려 궁성의 정남문인 승평문을 지나면 정전인 회경전에 이르기 전에 나타나는 문이다. 앞에는 구정이 있어 연등회와 팔관회를 비롯하여 반승 행사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하였다. 누각 형태여서 사료에는 ‘의봉루’로 적혀 있기도 한다.

중동팔관회는 11월 14일과 15일 양일에 걸쳐 설행되었다. 왕은 신하들의 인사를 받은 후 연등회 때와는 달리 왕만 의봉루(儀鳳樓)에서 태조의 영전에 진헌하여 팔관회 개최를 유훈으로 남긴 태조를 기렸다. 태조의 영전에 진헌하는 행사가 끝나면 본행사인 연회가 시작되었고, 연회가 끝나면 왕은 궁궐 동북쪽에 위치한 법왕사로 행차하여 고승을 초빙하여 법회를 열어 민심이 편안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기를 기원하였다.

팔관회 행사에서 신하들이 팔관일을 축하하며 국왕에게 올리는 하표는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확인하며 국가의 위상을 만천하에 과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하표를 가지고 의식에 참여한 신하의 복종심을 강화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지방 세력은 팔관회 참여를 통하여 왕권을 평가하고 중앙 정세를 살필 수 있었다.212) 또한, 팔관회는 관민이 어우러져 함께 즐기는 축제의 성격도 가지고 있어서 계층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도 되었다.213) 이처럼 팔관회는 고려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불교와 그 속에 포섭된 토착 신앙, 그리고 군신 관계를 상징하는 조하(朝賀) 의식을 의례 절차 속에서 연결시킴으로써 소속감을 재확인하고 사회 통합 기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팔관회가 대내적으로 소속감을 확인하며 사회 통합 기능을 하였다면 대외적으로는 국제 관계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다. 고려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전제로 하면서도 고려가 중심이 되어 중국과 병존하는 또 하나의 세계 질서를 모색하였다. 고려는 또 하나의 천하를 이루는 천자국(天子國)이었고, 팔관회는 이 천자국을 다스리는 고려 황제가 친히 집전하는 국가 의례로 외국인이 고려 국왕에게 조하하는 의식이 중시되었다. 팔관회에 조하하는 외국인은 고려에 복속된 것은 아니지만 고려가 중심이 되는 천하의 일원인 조공국(朝貢國)의 사자로 예우하였다.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송나라 상인들은 오늘날의 경제 사절단과 같은 성격으로 송나라를 대표하여 팔관회에 참여하였다. 여진(女眞)과 탐라(耽羅)의 사신은 이들에 대해 고려가 주도적인 입장임을 확인하는 정치적 의미에서 팔관회에 참석시켰다. 이처럼 팔관회의 외국인 조하 의식은 자신감이 넘쳤던 고려의 국가 위상을 뒷받침해 주는 국가 의례였던 만큼 팔관회 의례 절차는 복잡하였고 엄격하게 진행되었다.214) 한편, 팔관회에는 태조가 연등회와 팔관회의 상례적 설행을 당부하면서 강조한 군신동락의 요소도 강하게 남아 있어 백희(百戲)와 가무(歌舞)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팔관회 행사는 팔관보(八關寶)에서 담당했는데, 팔관회의 운영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설치된 기금의 성격이 강한 임시 기관이었다. 또한, 팔관회는 개경에서뿐 아니라 서경(西京)에서도 설행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서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는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도 달라졌다. 연등회의 경우에는 무신 집권기를 거치면서 상원연등회 대신에 기존에 불탄일 행사로 진행되던 4월 불탄일 연등회가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4월 불탄일 연등회는 강화 천도기에 국속(國俗)으로 자리 잡았고,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는 상원연등회를 대신할 정도였다.

불탄일 연등회는 순수한 불교 행사로 태조 신앙을 기반으로 한 상원연등회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특히, 원 간섭기에 태조 신앙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게 되면서 상원연등회가 자주 중단되는 대신 연등 공덕이 강조되는 순수한 불교 행사인 연등회는 성행하였으나, 공덕이 강조되면서 극도로 사치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연등회의 의미가 국가적 화합을 위한 행사에서 개인적 기복을 위한 공덕 신앙으로 축소되면서 국가 의례로서의 상원연등회의 위상은 점차 쇠락하였다. 공민왕 때 각종 국가 제도를 원 간섭기 이전으로 되돌리면서 국가 의례로서의 상원연등회가 설행되기도 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이미 4월 불탄일 연등회를 가장 중요한 불교 행사로 생각하였다.

팔관회의 경우도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위상에 변화를 맞게 되었다. 왕실 간의 혼인으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되면서 황제의 격식으로 행하던 연등회 절차에 제약이 가해졌고, 제후의 의례로 격하시켰다. 그리하여 원 간섭기 이후로는 명목상으로만 국가 의례로 팔관회가 간혹 시행되었을 뿐 이전의 면모는 상실하였고 그나마 제대로 설행되지도 못하였다.

<포구락(抛毬樂)>   
1795년(정조 19)에 편찬한 『정리의궤(整理儀軌)』의 도식(圖式)에 있는 포구락 그림이다. 포구락은 조선시대 궁중 연희에서 자주 공연되던 춤이다. 비단으로 만든 공을 구문에 집어넣는 놀이를 춤으로 표현한 것으로 팔관회 등 고려시대 연회에서 공연되었던 것에서부터 유래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통해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 질서 체계를 구현하면서도 각종 연회를 통해 군신이 함께 즐김으로써 절기 행사와 같은 축제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군신 간의 친목 도모와 왕의 정치적 권위를 확인하는 의례였고, 전 국민이 참여하는 축제적 성격도 강하였으며, 국가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여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행사이기도 하였다. 이 양대 행사에는 고려의 모든 문화적 역량이 총집결되어 각종 연희가 펼쳐졌고 각종 기물과 비단들로 행사장 일대와 사찰, 그리고 개경 시내 곳곳을 장식하여 태조가 훈요 10조에서 강조한 것을 충실히 이행한 군신동락의 축제였다.

지극히 ‘고려적’이며 ‘불교적’인 국가 의례인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를 대표하는 국가 의례로서 고려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연등회와 팔관회는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4월 불탄일 연등회는 민간 풍속으로 자리 잡았으며, 팔관회에서 설행되던 연희적 요소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궁중 연례(宮中宴禮) 속에 포함되어 남게 되었다.

[필자] 강호선
210)안지원, 『고려의 국가 불교 의례와 문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103쪽.
211)안지원, 앞의 책, 120∼131쪽.
212)안지원, 앞의 책, 207∼208쪽.
213)한국역사연구회, 『고려의 황도 개경』, 창작과 비평사, 2002, 227∼228쪽.
214)한국역사연구회, 앞의 책, 228∼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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