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 휴가와 여성 노동자
근로 기준법에 포함되어 있으나 직장에서의 권리 행사로 직접 이어지지 못하였던 ‘생리 휴가’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은 대기업의 보호 육성과 외자 기업의 유치 보호를 위하여 저임금 유지, 노동 쟁의 억제로 일관하였다. 국가와 자본에 의한 저돌적인 근대화 정책 속에서 여성 노동자는 근로 기준법을 근거로 자신의 권리를 내세움으로써,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노동자로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환기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여성의 몸을 노동하는 유순한 몸으로 훈육하는 과정은 다양한 노동 통제 장치를 통해 이뤄졌다. 동일 방직은 양성공(養成工)에게 많은 기계를 빨리 돌아다니며 이상 여부를 살필 수 있도록 1분에 140보를 걷는 훈련과 기계가 쉬지 않도록 끊어진 실을 빠른 속도로 이어 주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양성공들은 훈련 강도를 이기지 못해 몸살을 앓고 코피를 흘리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15세의 미싱사였던 최순희에 따르면 회사에서는 20시간씩 철야 작업을 시키려고 “피로(회복)제와 타이밍을 마구 먹이는 것”은 물론 며칠씩 집에도 보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노동 조건이 열악한 사업장일수록 관리자가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일이 많아 노동자는 “화장실 가는 것조차 눈치를 살피면서 가야” 하였고, 작업 시간 중에 자주 간다고 화장실 문을 잠가버려 “생리를 하 는 어떤 아가씨는 화장실에 가지 못하여 바지를 몽땅 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폭력을 통한 통제였다. 폭력은 종종 성과 결합되어 사업장 내에서는 성희롱이나 성폭력의 문제가 공공연하게 발생하였다.426)
1970년대는 노동 관계법이 있었지만 노동자의 단결권(파업권 포함)이나 단체 교섭권을 사실상 부인하는 특별법이 제정 시행되어 노동 운동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 경공업, 중소기업의 여성 노동자는 민주 노조 건설 및 노조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 임금 인상, 부당 해고 반대, 근로 조건 개선, 노조 결성과 활동 보장을 내걸었다.
C사의 경우 1973년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노동 조건의 개선을 이루었다. 노동조합 설립 이전에는 생리 휴가를 3개월에 한 번씩 사용할 수 있었고, 보건실의 간호원에게 생리 중임을 증명해야만 했었다. 더구나 감독한테 잘 보인 사람만 생리 휴가를 받을 수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노동조합은 생리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단체 협약에 명시하였다. 이후에는 생리 휴가 사용이 자유로워졌고, 사용하지 않으면 수당으로 지급되었는데도 이를 돈으로 받지 않고 휴가로 사용하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그뿐 아니라 생리 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회사 측의 노동 통제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427) 이렇게 생리 휴가는 1970년대 여성 노동자의 운동 속에서는 노동 조건에 대한 문제 제기의 한 고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생리 휴가가 노동 운동의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성 노동 운동의 주된 요구 사항은 근로 기준법의 이행과 임금 인상 등이었다. 민주 노조를 건설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리 휴가가 주목된 것이다. 생리 휴가는 근로 기준법에 규정된 법정 휴가의 보장 차 원에서 요구되었다. 이 당시 생리 휴가는 월경의 병리화 담론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고,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거부와 사문화된 법적 규정을 환기시켜 노동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활용되었다.
1953년에 제정되었을 뿐 거의 사문화되었던 조항들은 기혼 여성의 노동 시장 진출 급증, 국제적인 압력, 여성 노동자의 의식 변화, 여성 운동의 세력화 등에 따라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여성 노동자는 가족 부양의 일차적 책임이 없는 단신 노동력으로 결혼과 더불어 노동 현장을 떠나는 일시적·소모적 노동력으로만 취급되었다. 그리하여 여성 노동자의 건강이나 임신, 출산 등은 개인적으로 감수하거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생산직 기혼 여성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평생 노동권 확보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여성 노동자의 여성으로서의 문제 제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나왔고, 본격적으로 사회 이슈로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1980년대 말부터 기혼 여성 노동력이 증가하면서 모성 보호의 문제뿐만 아니라 양육과 관련된 탁아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였다. 1987년 남녀 고용 평등법 제정과 더불어 1990년대에는 여성 단체의 활발한 노력으로 모성 보호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고, 사회 분담화에 대한 논의로 진전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 환경과 건강의 문제를 모성 보호 문제로서 제기하였다. 결혼, 임신, 출산을 전후하여 노동의 단절이 이루어지면서 여성 노동자의 질병은 작업 환경과는 무관한 개인적인 질병으로 간주되는 실정을 비판한 것이었다. 모성 기능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모성 보호에는 현재 임신 출산기에 있는 여성 노동자의 보호 외에도 장차 이를 담당하게 될 여성 노동자 전체에 대한 보호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월경, 임신과 출산, 유산, 피임 등 직접적인 모성 기능에 관한 것, 모성 관련법 조항의 내용과 실제 효력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유해 물질이 여성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사회 문제화되자, 사업주들은 특히 유해 작업이라고 인식되는 공정에는 미혼 여성이나 가임기가 아닌 나이 많은 기혼 여성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임금이 낮기도 하거니와 임신과 출산이 모두 끝나서 그런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428) 또한 생리 휴가를 유급 휴가로서 사용할 수 있게 하기보다는 일종의 수당처럼 만들어 버리기도 하였다.
19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은 모성 보호를 단체 협약 내에 법의 수준을 상회하는 내용을 도입시키기도 하였지만, 여성 노동자가 실제 이용하여 제도로 정착시키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429) 상대적으로 근로 조건이 좋다고 알려진 사무직이나 금융직까지 포함하여 여성 노동자 전체에 대해 한국 노총이 1988년에 조사한 자료를 보면 생리 휴가를 쓰지 못한다고 응답한 경우가 27%나 되고, 유급으로 쉬는 경우는 20.3%에 불과하며, 절반 정도는 수당으로만 받고 쉬지 않는 상황이었다.430) 신청 절차가 복잡하거나 회사에서 승낙받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근까지 실제 권리를 행사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점에는 기업 내에 작용하는 암묵적이고 문화적인 압력도 작용하였다. 곧 직무에 대한 몰입도가 낮다고 평가하기 때문이었다.431)
부서장들이 여자 직원 생리 휴가 쓰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여자가 승진하려면 그런 것을 가려서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 회사에서도 어떤 부서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여자 중간 관리자들은 절대로 휴가 잘 안 써요. 다 애기 엄마들이죠. 그 사람들은 자기네들은 그런 휴가 안 쓴다. 뭐 하러 눈치 보이고 또 상사가 뒤에서 얘기하게 하느냐 그러죠.432)
1960∼1970년대 노동 운동과 1980년대 노동 운동 속에서 여성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환기시키는 하나의 고리로서 생리 휴가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법적으로는 확보하였지만 실제 권리를 행사하기 어려운 문화적·사회적 분위기는 결국 차이를 인정하고 사회적으 로 배려하는 것이 부족함을 보여 준다. 생리 휴가는 초기에는 여성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노동 환경과 월경에 대한 병리학적 이해 방식을 바탕으로 ‘모성 보호’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모든 여성 노동자를 재생산이나 ‘모성’의 범위 안에 가둘 수는 없다. 노동 환경은 변화하고 있고, 환경 오염 등으로 생기는 월경통 등 현재에도 여성 노동자가 겪는 현실적인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가 일에 몰두하기 힘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쾌적하게 일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를 확보하기까지는 생리 휴가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월경과 여성 노동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 갈 때 생리 휴가의 의미도 변화해 갈 것이다.
426) | 이정희, 「여성 노동자의 경험 읽기─1980년대 초반의 여성 노동 수기에 나타난 성·가족·노동─」, 『여성과 사회』 15, 창작과 비평사, 2004, 146∼14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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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 조옥라, 「70년대 여성 노동 운동에서 여성 특수 과제의 실현 조건에 관한 연구」, 서강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94, 35쪽. |
428) | 정혜선·이건정·박기남, 「생산직 여성 노동자의 건강과 모성 보호」, 『여성과 사회』 2, 창작과 비평사, 1991, 81∼95쪽. |
429) | 정혜선, 「모성 보호의 기업 내 제도화와 노동조합」, 『한국 여성학』 12─1, 한국 여성 학회, 1996, 46쪽. |
430) | 한국 노총, 「조직 여성 노동자의 실태 조사」, 1988. 정혜선, 앞의 글, 105∼106쪽 재인용. |
431) | 이주희, 「일과 가족의 양립은 어떻게 가능한가─기업 조직 문화와 여성 관리직 모성 보호─」, 『가족과 문화』 15, 한국 가족 학회, 2003, 38쪽. |
432) | 이주희, 앞의 글, 45쪽 재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