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1. 부국강병의 길조선만의 독특한 화기를 완성하다

소형 화기의 개발

조선 전기의 화기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소형 화기는 세총통이다. 세총통은 전체 길이가 14㎝, 구경이 0.9㎝에 불과해 조선시대에 제작된 화기 중에서 가장 작은 형태이다. 이 총통이 주목되는 이유는 크기도 매우 작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에 유례가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형 화기의 구조는 총신 부분과 화약이 들어가는 약실 부분, 그리고 총신의 끝 부분에 달려 있는 모병(冒柄, 자루를 끼우는 곳)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모병에 나무 자루나 창대를 끼운 후 총신 끝에 붙은 자루를 오른팔의 겨드랑이 밑에 끼우고 오른손으로 총신을 단단히 붙잡은 상태에서 조준하고 왼손에 심지를 잡고 점화구(點火口)에 갖다 대어 점화하는 것이다. 아니면 자루를 오른팔 겨드랑이에 끼고 왼손으로 붙잡은 채 오른손으로 점화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세총통을 제외한 모든 소형 화기는 총통 뒤의 모병에 나무 자루를 끼워서 사용한다.

그런데 세총통은 이러한 화기와 달리 모병이 없이 약실 끝 부분에서 마감되었다. 자루를 끼우는 모병이 없다면 총신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였을까? 바로 쇠 집게와 같은 철흠자(鐵欠子)가 별도로 있어 이를 가지고 총신을 잡고 사용하였던 것이다. 결국 세총통은 크기가 너무 작아 사격할 때는 손으로 직접 잡지 못하고 철흠자를 이용하여 사격하는 것이다. 자칫 번거로울 수 있는 철흠자를 왜 사용하였을까? 여기서 당시 화기 제조 기술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세총통>   
세종 때 개발한 개인 휴대용 화기이다.
<복원한 세총통과 세전>   
세총통과 세전을 복원한 것으로 철흠자로 고정시켜 놓은 모습이다. 세총통은 가장 크기가 작고 철흠자를 이용해 잡고 발사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권총과 유사하다.

화기의 개인 휴대가 간편하려면 일단 크기가 작고 가벼워야 한다. 그런데 당시에 쓰던 소형 화기는 꽤 무거워 사용하는 데 많은 애로가 있었다. 『세종실록』에 당시 화기는 힘이 센 사람만 쏠 수 있고, 설사 쏜다 해도 두세 발 쏘면 팔이 아파서 더 이상 쏘지 못하기 때문에 크기를 줄이고 무게를 가볍게 개량해야 한다는 논의가202) 나오는데, 세총통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화기의 주조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하였기에 화기의 크기와 무게를 줄이는 데 많은 애로가 있었다. 따라서 세총통의 개발은 주조할 때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는 정교한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세총통처럼 극소형으로 제작하다 보니 총신이 너무 가늘어 모병에 나무 자루를 만들어 끼우더라도 자루가 발사할 때 폭발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자루 대용으로 탄성이 강한 주철로 만든 철흠자를 고안하여 이를 통해서 총통을 잡고 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세총통에는 우리나라 국방 과학 기술의 우수성과 선현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세총통을 쏘는 모습을 상상해 보노라면 마치 권총을 쏘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권총의 시원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다.

세총통은 세종 재위 시절에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개발한 화약 무기 중의 하나이다. 개발 초기에는 적진에 침투하는 정찰병들이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고안하였으나 이후 기병이 사용하였다.203) 기병이 안장에 장전되어 있는 여러 개의 세총통을 넣고 다니다가 유사시에 꺼내 쏘기에 매우 편리하였기 때문에 기병의 휴대 무기로 긴요하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여자나 어린이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한 무기라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당시 쓰던 세총통·철흠자의 설계도와 제원은 1474년(성종 5)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병기도설(兵器圖說)」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당시에 만든 유일한 유물이 육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 박재광
202)『세종실록』 권107, 세종 27년 3월 계묘.
203)『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6월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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