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2. 국왕을 계승하는 왕실 가족

대군, 군

국왕의 아들은 모두 대군(大君) 혹은 군(君)으로 봉해진다. 국왕의 적자(嫡子)일 경우에는 군을 거쳐서 대군으로 나아가지만, 서자(庶子)일 경우에는 군에서 그친다. 대군과 군의 품계는 정1품보다 상위에 있는데, 이는 국 왕의 자식인 대군과 군의 지위가 국가의 최고위 관리보다 더 높았음을 의미한다. 다만 군으로 봉해진 사람 중에는 정1품에서 종2품에 해당하는 군이 있는데, 이는 국왕의 아들이라도 모친이 양인이나 천인 출신이면 정상적인 경우보다 한 등급을 낮추게 되며, 왕세자나 대군의 자식인 경우에는 부친보다 다시 한 등급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월중도 제2폭>   
19세기에 강원도 영월 지역을 그린 군현도인 월중도(越中圖) 8폭 중의 제2폭으로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淸冷浦)를 그린 것이다.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한 뒤 상왕이 되었다가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군으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후일 숙종 때 다시 대군을 거쳐 왕으로 복권되었다. 결국 단종은 국왕-상왕-군-서인-대군-국왕으로 신분이 바뀐 비운의 인물이었다.

국왕으로 있다가 쫓겨나 대군이나 군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정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나는 경우를 말하는데 연산군이나 광해군이 이에 해당한다. 단종의 경우는 좀 복잡하다.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직후에는 상왕(上王)이 되었다가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노산군(魯山君)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죽임을 당했으며, 숙종에 의해 다시 노산 대군을 거쳐 단종으로 복권될 수 있었다. 국왕에서 서인 사이를 왕복한 것이다.

국왕의 아들이 궁중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모두 군, 대군으로 봉해진다. 대군과 군은 결혼을 함과 동시에 궁궐을 벗어나 민간에서 생활하게 되며, 종친의 일원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4대가 내려올 때까지이며, 그 이후로는 다른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과거 시험을 치러 관리로 진출할 수가 있었다.

대군이나 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정을 성공시킨 세력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국왕이 아들이나 손자가 없이 사망하면서 후계자로 지목을 받는 경우이다. 중종과 인조는 반정 세력에 의해 추대되었고, 명종, 선조, 철종, 고종은 국왕이나 대왕대비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을 받았다. 세조는 대군으로 있으면서 영의정을 겸하는 상황에서 국왕이 되었는데, 형식상으로는 단종의 선위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반정에 가깝다. 그런데 반정에 의해 국왕이 된 경우는 앞서 즉위식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대군이나 군이 후계자가 없이 사망한 국왕을 계승한 경우를 살펴하기로 한다.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종의 아우였는데, 인종에 의해 전격적으로 계승자가 되었다. 1545년(인종 1) 6월 29일에 인종은 아우인 경원 대군에게 왕위를 전하겠다고 명령했다. 이날은 왕위에 오른 지 8개월밖에 되지 않은 인종이 사망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대신들이 국왕에 가까이 가서 의사를 재확인한 다음 전위 단자(傳位單子)에 계자(啓字) 도장을 찍었고 이 사실을 왕대비에게 보고했다. 당시 왕대비는 중종의 계비이자 경원 대군의 모후인 문정 왕후(文定王后)였는데,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매우 놀랐다. 첫 번째로 나온 반응이 “이 어리석은 아이를 데려가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천하에 이처럼 망극한 일이 다시 있겠는가?”였다. 당시 경원 대군, 즉 명종의 나이는 12세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얼마 후 인종이 사망하자 상황이 급박해졌다. 왕대비는 경원 대군을 옆에서 돌보기 위해 자신의 처소를 창경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겼고, 경원 대군은 궁 밖의 사제에서 살다가 경복궁 안으로 들어왔다. 이후 경원 대군은 인종의 국상을 주재했고, 7월 6일에 성복을 한 후 국왕 즉위식을 거행했다.

선조가 왕위 계승자로 결정되는 상황은 명종보다 더욱 급박했다. 명종이 병석에 누운 지 이틀 만에 별다른 유언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1567년(명종 22) 6월 28일의 일이다. 후계자를 결정한 사람은 왕비인 인순 왕후(仁順王后)였다. 왕비는 을축년(1565)에 명종이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을 후사로 삼도록 하라는 언급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하성군을 후계자로 정하라고 명령했다.

<선조 어필>   
명필이라는 평가를 받던 선조가 당나라 시인 옹도(雍陶)의 ‘과남린화원(過南隣花園)’을 쓴 것이다. 선조는 조선 왕실에서 처음으로 국왕의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주인공이다.

하성군이 명종의 후계자로 결정되면서 이름이 균(鈞)에서 연(昖)으로 바뀌었다. 원래 명종에게는 순회 세자라는 아들이 있었다. 순회 세자는 1563년(명종 18)에 13세의 나이로 부친인 명종보다 먼저 사망했는데 그의 이름은 부(暊)였다. 그런데 이제 하성군이 명종의 아들로서 국왕이 되므로 순회 세자와 같은 일(日) 자 부수를 써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하성군 선조는 궁궐 안으로 들어온 날부터 명종의 국상을 주재했다. 선조는 조선 왕실에서 처음으로 국왕의 방계(傍系)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이후 선조는 명종의 아우이자 자신의 생부인 덕흥군(德興君)을 덕흥 대원군으로 추존했다.

철종이 계승자로 결정되는 과정에는 대왕대비가 완전한 결정권을 가졌다. 명종이나 선조는 사전에 국왕의 유언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849년(헌종 15) 6월 6일에 헌종이 중병에 빠지자 국왕의 대보가 대왕대비에게 옮겨졌다. 그리고 얼마 후 헌종이 사망했다. 조 정의 대신들은 대왕대비를 만나 후계자 선정이 급하므로 빨리 그 이름을 문자로 써 줄 것을 요청했다.

대왕대비 : (소리 내어 울며) 하늘이 어째서 차마 이러는가? 하늘이 어째서 차마 이러는가?

조인영 : (울부짖고 흐느끼며) 오백년 종묘사직이 어찌 오늘 갑자기 이렇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정원용 : 신들이 복이 없어 이런 무너지는 아픔을 당했으니 하늘과 땅이 망망합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드리겠습니까마는 종묘사직이 매우 위험합니다. 신민(臣民)이 바라는 것은 오직 우리 자성(慈聖) 전하이십니다.

김도희 : 종묘사직의 대계가 한시가 급합니다. 바라건대 빨리 하교하소서.

대왕대비 :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며) 종묘사직의 부탁이 시급하다.

정원용 : 종묘사직의 대계가 급합니다. 바라건대 너그러이 억누르고 분명하게 하교하시어 신들이 상세히 듣게 하소서. 이는 막중하고 막대한 일이오니 말씀으로만 받들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문자로 써서 내리소서.

대왕대비 : 여기 문자로 쓴 것이 있소.

정원용 : 연세가 지금 몇입니까?

대왕대비 : 19세이다.

조인영 : 종묘사직의 대계가 이미 정해졌으니 아주 크게 다행입니다. 이는 지극히 중대한 일이오니 얼마의 군대를 먼저 보내어 본 집을 호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왕대비 : 먼저 호위 군대를 보낸다는 말은 좋다.

정원용 : 이 일은 매우 중대하므로 신적(信蹟)을 받들고 가서 공경히 전하고 받는 것이 예의에 맞습니다. 이제 내리신 자교(慈敎)를 승정원(承政院)에서 깨끗이 필사하게 하여 자성께서 살펴보신 뒤에 도로 내리시면 채여(彩輿)를 받들고 의장을 갖추어 신들이 배종(陪從)하여 공경이 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왕대비 : 일의 형세가 아뢴 바와 같으니 그렇게 하라.44)

<철종 어진>   
31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6·25 전쟁 때 절반이 불타 버린 것을 복원한 것이다. 이원범(철종)은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1849년 대왕대비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덕완군에 책봉된 다음 궁궐로 들어와 왕위에 올랐다.
<강화도 행렬>   
1849년 8월 왕위에 오른 이원범을 강화도로 데리러 가는 행렬을 그린 그림의 부분이다.

이날 대왕대비는 강화도에 사는 이원범(李元範)을 후계자로 정했는데, 영조의 핏줄로 남아 있는 사람이 헌종과 이원범 밖에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이원범이 사도 세자의 아들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종친이기는 했지만 아직 군(君)에도 봉해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대왕대비는 8월 6일에 이원범을 덕완군(德完君)에 봉한다는 봉작(封爵) 교지를 전했고, 덕완군은 8월 9일에 궁궐로 들어와 헌종의 빈전에서 거애(擧哀)를 했다. 이날 덕완군은 관례(冠禮)를 치르고, 빈전에서 대보를 받았으며, 그대로 인정문으로 나와 국왕 즉위식을 거행했다. 불과 3일 만에 이원범의 지위는 종친 → 군 → 국왕으로 급변했던 것이다.

고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도 철종과 비슷했다.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철종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국왕의 대보가 대왕대비에게 전달되었 다. 얼마 후 철종이 사망하자 대왕대비는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李命福)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명령했다. 대신들은 언문(諺文) 교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고, 대신들이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대비의 확인을 받은 후 반포했다. 대왕대비는 이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했고, 영의정 이하 대신들이 대왕대비의 교서를 받들고 익성군의 사제로 가서 새 국왕을 맞아 왔다. 익성군은 창덕궁으로 들어오자마자 머리를 풀고 철종의 빈전에서 거애를 했으며, 관례를 치렀다. 12월 13일에 성복을 하자 익성군은 빈전에 나가 대보를 받은 다음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흥선 대원군 초상>   
고종의 부친인 흥선 대원군의 초상화이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신헌 왕후(神貞王后, 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이명복(고종)에게 왕위를 전하라고 명하였다. 아들이 국왕이 된 이후 흥선 대원군은 국가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대원군은 국왕이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 방계(傍系)로서 왕위를 이은 국왕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을 말한다.

이상에서 보면 명종과 선조는 왕세자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유언에 의해 후계자로 정해진 경우였다. 그러나 철종과 고종은 국왕의 유언조차 없는 상태에서 전적으로 대왕대비의 판단에 따라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또한 철종과 고종은 군으로 봉해지지도 않은 상태였으므로, 대왕대비가 이들을 군으로 봉하고 관례까지 치른 다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대왕대비가 왕위 계승 과정에서 전권을 행사한 것은 후계자가 결정되는 동안 국왕을 상징하는 대보의 관리권이 대왕대비에게 있었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필자] 김문식
44)『헌종실록』 권16, 헌종 15년 6월 임신(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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