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3. 국왕을 대신하는 정치

분조

분조(分朝)는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국왕이 다스리는 조정과는 별도로 왕세자가 직접 다스리는 조정이 조직된 것을 말한다. 분조는 대리청정이나 수렴청정보다는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만 조직되므로 그 사례가 많지는 않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왕세자 광해군의 분조가 있었고,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소현 세자의 분조가 조직된 정도이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정부에서는 전쟁의 형세를 살피다가 사정이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때 분조를 조직했다. 그러면 왕세자는 별도로 조직된 분조를 이끌고 지방으로 내려가서 현지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사와 군량미를 거두어 전쟁터로 조달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분조가 활동하는 동안에는 국왕이 다스리는 조정과 분리되어 움직이게 되는데, 이는 국왕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까지 대비하는 의미가 있었다.

<부산진순절도>   
1592년(선조 25) 4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전투 장면을 그린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은 정국 안정과 민심 수습을 위하여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왕세자가 된 지 한 달 만에 선조가 지휘하는 조정과 별도로 분조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먼저 광해군의 분조에 대해 검토해 보자. 1592년(선조 25)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대나무를 쪼개듯이 북상을 계속했고, 4월 28일에는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이들과 맞서 싸우다가 참패하고 자살해 버렸다. 이 소식이 서울로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피 난 보따리를 싸느라 어수선한 가운데 우부승지 신잡(申磼)이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우선 왕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신잡은 바로 탄금대에서 사망한 신립 장군의 형이었다.

신잡 :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는데 세자를 책봉하지 않고는 이를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일찍 대계(大計)를 정해 사직의 먼 장래를 도모하소서.

주서·사관 : 세자 자리가 오래 비어 있으니 세자를 책봉하는 일을 누군들 원하지 않겠습니까. 세자를 세우면 인심이 진정될 것입니다.54)

선조는 대신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왕세자 적임자를 의논했고, 대신들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선조의 발언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선조가 광해군을 지목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튿날 이현(梨峴)에 있던 광해군의 저택으로 호위병이 파견되었고, 광해군이 왕세자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외부로 발표되었다. 이때 광해군의 나이는 18세였다.

5월 1일에 선조는 개성에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반포했고, 6월 1일에는 왕세자에게 분조를 명령했다. 조정을 둘로 나누어 분조를 만들고 왕세자에게 인사권과 상벌권을 넘기겠다는 내용이었다.

세자 이혼(李琿)은 훤칠하고 숙성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자못 알려졌다. 아랫사람들이 사랑하며 떠받들어 국가를 중흥시키는 공을 돕기에 충분하고, 사방에서 은덕을 노래하며 모두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전에 결정했거니와 군국(軍國)의 대권을 총괄하도록 하려고 한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나랏일을 다스리게 하노니, 관직을 내리고 상벌을 시행하는 일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해서 하게 하라.55)

10월 20일에 선조는 의주에 피난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국정을 분조를 이끌고 있는 왕세자에게 맡기겠다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중국에 군대를 청하는 것과 선군(先君)을 위해 주선하는 일은 내가 어찌 몸과 마음을 다해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지 않겠는가. 나머지 기무(機務)들은 분조에서 처리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국가를 회복시키는 희망도 오직 여기에 달려 있다. 또 처음에 나를 뒤따라 온 인원들은 자기 처자를 돌보지 않고 험한 길을 따라왔는데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그 후로 뒤쫓아 온 사람들은 동궁에게 보내 힘을 다해 동궁을 돕게 한다면 반드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56)

<이항복 초상>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 때 여기에 소속되어 활약한 이항복의 초상화이다. 광해군이 이끈 분조는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을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항복을 비롯하여 광해군의 분조를 좇아 공을 세운 사람들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었으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폐삭(廢削)되었다.

광해군의 분조 활동은 1592년 6월부터 1593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광해군의 분조는 선조가 지휘하는 조정과 별도로 활동했는데, 분조에 소속된 인물 중에는 영의정 최흥원(崔興遠)을 비롯하여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한준(韓準), 정창연(鄭昌衍), 김우옹(金宇顒), 심충겸(沈忠謙), 황신(黃愼), 유몽인(柳夢寅), 이정귀(李廷龜) 등이 있었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국가의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특히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을 돌면서 흩어져버린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기에 힘썼다. 1593년 윤11월, 광해군은 다시 무군사(撫軍司)를 이끌고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돌면서 병력을 모집하여 훈련시켰고, 군량을 수집하여 명나라 군대로 공급했다. 광해군이 무군사를 이끌 때에는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비롯하여 이항복, 한준 등이 무군사에 소속되었다. 임진왜란을 맞아 광해군은 분조와 무군사를 이끌면서 거의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를 통해 광해군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국왕의 업무를 실습할 기회 도 가졌다.

다음으로 소현 세자의 분조는 1627년(인조 5)에 나타났다. 소현 세자는 인조와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맏아들로 태어나 1625년에 14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런데 소현 세자의 분조 논의가 처음으로 나온 것은 그가 원자로 있던 1624년(인조 2) 2월의 일이다. 영변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서울을 압박해 오자 조정의 대신들이 피난 계획을 세우면서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여 국본을 세우고 분조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조는 외국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내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조는 “아직 원자의 나이가 어리므로 천천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를 거절했다. 이 논의가 있은 지 며칠 후 이괄의 난이 진압되었기 때문에 분조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정묘호란이 발생한 것은 1627년 1월 13일이었다. 후금 군대가 의주를 침략했다는 소식이 1월 17일에 조정에 알려졌고, 이내 왕세자의 분조 논의가 시작되었다.

분조의 거사는 한나라와 당나라 이래로 시행한 예가 있습니다. 더구나 강화도는 해도(海島)에 치우쳐 있으므로 대가(大駕, 인조)가 한 번 이곳에 들어간 이후에는 조정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각도의 조운(漕運)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찌 크게 걱정스럽지 않겠습니까? 세자는 비록 어리지만 평소에 신하와 백성들이 사랑하고 받드는 마음이 있었는데, 난리가 닥쳤으니 감독하고 보살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고사를 따라 즉시 분조를 명하시고 원로대신에게 당부하여 내외를 조절하고 국가를 회복시킬 계책으로 삼아야 합니다.57)

국왕 인조는 조정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왕세자는 본토에 남아 분조를 이끌며 국가를 회복시킬 계책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였다. 인조 는 이번에도 세자가 어리다는 핑계를 대면서 세자 대신에 조정의 관리가 남쪽으로 가서 민심을 수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때 소현 세자의 나이는 16세였는데, 앞서 광해군이 18세에 분조를 이끌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대세는 왕세자가 분조를 이끄는 것으로 기울었고, 인조는 마침내 이를 수용했다.

소현 세자가 분조를 이끌고 서울을 출발한 것은 1627년 1월 24일이었다. 이때 분조에 소속된 관리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을 비롯하여 신흠(申欽), 한준겸(韓浚謙), 심열(沈悅), 최관(崔瓘), 이명준(李命俊), 이성구(李聖求), 이식(李植), 유비(柳斐), 정홍명(鄭弘溟) 등이 있었다. 왕세자가 분조를 이끌고 남쪽으로 떠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했고, 김상용(金尙容)은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켰다. 소현 세자가 이끄는 분조는 수원, 직산, 공주, 여산을 거쳐 2월 6일에 전주에 도착했고, 3월 13일까지 전주에 있으면서 분조를 운영했다.

<이원익 초상>   
정묘호란 때 소현 세자가 분조를 이끌 때 여든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여기에 소속되어 활약한 이원익의 초상화이다. 소현 세자의 분조는 전주에 머물며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소현 세자는 전주에서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고 군량과 의병을 모집했으며, 무사를 선발하여 전장으로 올려 보냈다. 전주에서 벌인 세자의 분조 활동은 그때그때 문서로 작성되어 강화도에 있는 인조에게 보고되었는데, 훗날 이식은 소현 세자의 분조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린 나이에 군대를 이끌 때에는 스스로 명령을 내려 지휘하면서 대조(大朝, 인조)의 명령을 따랐다. 자신에게 바치는 물품을 절감하고 따르는 사람을 엄격히 단속했으며, 폐단을 줄이고 백성들을 여유롭게 해주기에 힘썼다. 주현(州縣)에 명령하여 농사철을 놓치지 않게 했고, 길을 가다가 진창에 깔아 놓은 짚을 보고 “이것은 군대를 일으킬 때 말먹이로 쓰는 것이니 절대로 헤프게 쓰지 말라.”고 명령하셨다.58)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쪽으로 내려오던 후금군은 평산에 이르러 진격을 멈추었고, 3월 3일에는 조선과 강화 조약을 맺고 철군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저항이 거세어진 데에다가 후면에서 명나라가 자신들의 본거지를 공격하리라는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후금군이 물러가자 소현 세자의 분조 활동도 끝이 났다. 소현 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를 출발하여 인조가 있는 강화도로 들어갔고, 5월 5일에 왕대비와 왕비를 모시고 서울로 환궁했다.

<호병도(胡兵圖)>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청나라 군사의 모습이다. 이를 통하여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소현 세자의 분조 활동은 2개월이 못 되는 짧은 기간에 끝났다. 그런데 소현 세자는 이후 청나라의 인질이 되어 심양(瀋陽)에서 생활했는데, 이때에도 분조와 비슷한 활동을 했다. 1637년(인조 15) 1월 30일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삼전도(三田渡)로 나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이날 인조는 태종과 12개조로 구성된 강화 조약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조선 국왕의 장자와 차자를 인질로 보낸다는 내용이 있었다. 소현 세자 일행은 2월 8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4월 10일에 심양에 도착했고, 이후 1645년(인조 23) 2월 귀국할 때까지 8년 동안 심양에서 머물렀다.

소현 세자가 심양에 있는 동안 조선과 청의 외교는 세자가 거처하는 심양관(瀋陽館)을 통해 이루어졌다. 청나라 정부가 바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양국 간에 긴급한 사안이 있는 경우로 제한되었다. 심양관은 조선과 청의 외교를 담당하는 대사관 내지는 외교 대표부로 기능했고, 소현 세자는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소현 세자는 외교 현안이 생기면 장계(狀啓)를 작성하여 조선 정부로 보냈다. 장계란 국왕의 명령을 받아 파견된 신하가 현지에서 작성해 올리는 보고서를 말하는데, 왕세자를 수행한 시강원의 관리가 심양에서 장계를 작성하여 한양의 승정원으로 보내면 승지가 이를 받아서 인조에게 보고했다. 장계는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이나 관리가 돌아갈 때에는 인편을 통해 부쳤고, 급박한 사안이 있을 때에는 심양관의 관리를 별도로 파견했다.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삼전도에 세운 청나라의 전승비(戰勝碑)이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세운 이후 파묻혔다 세워지기를 반복하였다.

소현 세자가 처리한 외교 현안 가운데 제일 심각한 것은 청나라에서 조선의 군병과 식량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요동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명나라 본토를 공격하는 상황이었는데, 조선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조선과 명나라의 틈을 벌리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전략을 구사했다. 다음으로 조선인 포로를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문제가 있었다.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청나라와 몽고는 조선인 포로 수십만 명을 잡아갔는데, 그중 일부는 무상으로 돌려보냈지만 대부분은 몸값을 지불해야 풀려날 수 있었다. 심양의 남문에는 포로를 매매하는 시장이 열렸고, 풀려난 포로들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으로 보내졌다.

소현 세자의 심양관은 조선에서 청나라로 들어오는 모든 인원과 물자를 처리하는 장소였다.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청나라의 상황을 파악했고, 조선에서 보내는 물품과 군병, 군량도 이곳을 통해 전달되었다. 또한 소현 세자는 청나라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종군하면서 중국 대륙에서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역사적 현장을 목격했다.

소현 세자는 분조 활동과 심양관 생활을 통해 엄청난 시련을 경험했고 국정을 운영하는 능력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소현 세자는 인조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는데, 인조는 청나라 황실과 가까워진 세자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소현 세자는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그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삼전도비의 제액-한자>   
삼전도비의 제액(題額) 부분의 탁본이다. 비석의 본래 이름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썼다.
<삼전도비의 제액-여진 글자>   
[필자] 김문식
54)『선조실록』 권26, 선조 25년 4월 정사(28일).
55)『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6월 기축(1일).
56)『선조실록』 권31, 선조 25년 10월 병오(20일).
57)『인조실록』 권15, 인조 5년 1월 정해(19일).
58)『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 6월 신유(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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