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1.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고려 성리학의 재생산

다음 단계는 고려 성리학의 재생산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대체로 14세기 중·후반(공민왕∼우왕)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는 중국의 정정이 불안해진 틈을 계기로 공민왕이 독립 정책을 펴면서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에 알력이 생겨 학자 간의 교섭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리학이 이미 고려에 뿌리를 내려 자체적으로 수많은 학자가 양성되고 있었다. 사실 고려 성리학의 자체 양산은 백이정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하에서 이제현·박충좌·이곡·이인복·백문보 등이 나왔고, 이제현은 이색 등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다.

이색은 고려 말기 유학의 종장으로서 그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이숭인(李崇仁, 134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박상충(朴尙衷, 1332∼1375) 등을 배출하였고, 다시 정몽주의 문하에서 권근, 길재(吉再, 1353∼1419) 등이 나와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개성 성균관의 명륜당>   
개성 성균관은 고려 초에 세운 교육 기관으로 지금 건물은 17세기 초에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1310년 국자감에서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367년 이색이 대사성으로 있을 때 많은 학자를 키워 내어 성리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성리학 발전은 관학인 성균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367년(공민왕 16)에 이색이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때 정몽주, 김구용(金九容, 1338∼1384),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임명하여 학자를 많이 키웠다. 뒤를 이어 정몽주, 정도전 등이 대사성을 역임하고, 박상충, 박의중(朴宜中, 1337∼1403) 등이 교관을 지내면서 성리학의 학풍이 크게 진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이념으로 결집되어 큰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 집단이다. 그들은 성리학의 이념 위에서 불교를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사회 혁신 이념을 구축하였고 권문세가(權門勢家) 등의 기득권 세력과 대항하는 정치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이 곧 이성계 세력과 연합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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