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

1.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필자] 이영춘

성리학(性理學)은 중국 송대에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유학으로 흔히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 이학(理學) 혹은 신유학(新儒學)으로 부르고 있다.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도입한 성리학은 사대부 계층의 학문이 되었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개혁의 이념이 되었다. 이는 고려 귀족 사회의 이념이었던 불교를 극복하고 중소 지주층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이념을 중심으로 결집된 정치 세력이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 세력이다. 그들은 신흥 군벌 세력이던 이성계(李成桂) 일파와 연합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들의 사회 개혁론은 조선 왕조 개창의 정치 이념이 되었고, 이후 성리학은 불교를 대체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기본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초까지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철학적 탐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중국 성리학자들의 연구를 학습하고 이해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15세기 중엽부터 국내에서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주자대전(朱子大全)』 등이 간행되고 사림(士林)의 도학(道學) 진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창의적인 저술이 많이 나타났고, 치열한 학문 논쟁이 전개되 면서 연구가 심화되었다. 그 결과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주리론(主理論)을 종지(宗旨)로 하는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주기론(主氣論)을 핵심으로 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형성되어 이후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성리학의 철학적 심화는 동시에 사림의 도학 정치를 지향하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사상, 향약 운동을 통한 사회 교화 사상, 서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 운동,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기초로 한 윤리 실천 운동 및 예학(禮學)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성리학은 전문 학자들의 현학적인 학문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저변으로 확산되어 조선 후기의 사회 생활과 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59)

<태조 이성계 어진>   
1872년(고종 9)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에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결집된 정치 세력인 신진 사대부 세력과 연합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에 국가 통치와 사회생활의 이념이 되었던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및 저변화에 중요한 이슈가 되었던 문제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필자] 이영춘
59)조선시대의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장지연, 『조선 유학 연원(朝鮮儒學淵源)』, 회동 서관(匯東書館), 1922. ; 현상윤, 『조선 유학사』, 민중 서관, 1949. ; 배종호, 『한국 유학사』, 연세 대학교 출판부, 1974. ; 박충석, 『한국 정치 사상사』, 삼영사, 1982. ; 이병도, 『한국 유학사략(韓國儒學史略)』, 아세아 문화사, 1986. ; 이병도, 『한국 유학사』, 아세아 문화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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