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비판과 새로운 사회의 이념
삼국시대 이래 고려까지는 불교가 지배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왕실에서부터 하층 사회까지, 정치에서부터 경제·사회·문화의 각 방면에 이 르기까지 불교의 영향은 컸다. 불교는 종교로서의 주된 기능이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식을 주고 내세의 복락(福樂)을 약속하는 것이었고, 정치적으로는 국가의 통합을 이루게 하며, 경제력의 집중을 통해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문화 창조의 바탕이 되어 철학·문학·미술 등 여러 방면에서 민족 문화 발달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지나친 융성에는 사회적 폐단도 적지 않았다. 고려시대를 지나면서 전국 각처에 수많은 불교 사찰이 들어서고 출가 승려들이 폭증하면서 재정의 낭비, 공민(公民)의 축소, 세수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특히 왕실과 귀족의 보호를 받는 사찰은 많은 농장과 노비를 소유하여 영리를 추구하였고, 여러 가지 명목의 불사(佛事)를 일으켜 많은 재물을 소비하였다. 사찰이 누리는 면세 등 각종 특혜는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고, 백성들이 과도하게 많이 승려가 되는 것은 노동 인력을 고갈시키고 군역(軍役)이나 부역(賦役) 자원을 소진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교 사찰의 폐단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까지 대부분의 유학자는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비판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비판은 대체로 사찰의 사회적 폐단과 같은 표면적인 문제에 국한되었다. 당대 유림의 종장이던 이제현이나 이색 같은 유학자도 불교에 대해서는 온건한 비판에 그쳤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고 신진 사대부 계층에서 이를 하나의 이념으로 신봉하면서 불교에 대한 비판도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비판도 나타났다. 이는 성리학이 한·당대의 유학에 비하여 정교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성리학은 형성기인 송대부터 명분과 의리를 강조 하고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을 구분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유학을 정통 학문으로 신봉하고, 불교나 도교를 이단시하여 배척하려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최해·백문보·정몽주 같은 성리학자였다. 이들은 불교를 강경하게 비판하였고 조정에 도첩제의 강화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철학적인 기초 위에서 본격적으로 불교 교리를 비판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등의 저술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우위를 선양하고자 하였다. 그의 불교 비판은 전대 학자에 비하여 체계적이고 종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강경하기도 하였다. 그의 불교 비판이 중시되는 것은 그것이 개인적인 비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바로 조선 왕조의 억불 정책(抑佛政策)으로 연결되어 이후 500여 년간 항구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왕조의 개국 1등 공신이었고, 국가 건설의 초석을 놓은 이론가였다. 이 때문에 그의 불교 비판은 조선 왕조의 유교적 통치 이념을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고, 불교 중심의 사회에서 유교 중심의 사회로 전환하는 데 이정표(里程標)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