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발전의 배경
16세기 성리학 발달의 배경으로는 조선 왕조의 유교 교육 진흥, 경서(經書)와 성리서(性理書)의 간행과 보급, 사림의 형성과 도학 정치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왕조는 문치주의 유교 국가였으므로 교육은 양반 관료의 양성이나 사대부의 교양 습득뿐 아니라 국민 전체의 유교적 교화를 위해서도 중시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관학의 진흥을 통한 국가 차원의 교육 정책이 추진되었다. 중앙에는 성균관과 사학(四學)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鄕校)를 두어 교육을 장려하였고, 이는 유명무실하던 고려시대의 학교 정책이나 교육 실정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정기적 으로 또는 수시로 설행(設行)된 과거 시험을 통하여 유교 교육을 독려하였다. 16세기부터는 지방의 사림을 중심으로 사학(私學)을 통한 교육 운동이 일어나 성리학의 전수와 확산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1541년(중종 36)부터 서원(書院)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관학을 압도하게 되었다. 16세기 사림의 서원 설립 운동은 성리학 발달의 기폭제가 되었다.
서적의 보급은 학문 연구와 교육에 초석이 되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태종·세종대부터 여러 종류의 활자를 주조하여 관찬(官撰) 사업을 왕성하게 전개하면서 유교 경서의 국내 간행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1415년에 처음 편찬 간행된 『성리대전』이 1427년(세종 9)에 경상도에서 간행되었고, 1428년에는 강원도에서 『사서대전』이, 경상도에서 『주역』·『서경대전(書經大全)』·『춘추대전(春秋大全)』 일부가, 전라도에서 『시경대전(詩經大全)』·『춘추대전』 일부가, 1429년에는 전라도에서 『예기대전(禮記大全)』이 목판본으로 간행되고 후에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주자어류(朱子語類)』는 1476년(성종 7)에 명나라에서 전래되었다. 유교 경전과 성리서의 간행 보급은 16세기 성리학 발달의 초석이 되었다.
조선 성리학의 발달은 무엇보다도 사림으로 부르는 학자군이 형성되고, 그들의 왕성한 학문·교육 활동과 정치적·사회적 실천 운동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림은 중소 지주층 출신의 양반 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된 광범위한 학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종래의 관학 출신 양반 관료도 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들은 정치적 성향이 강하여 학문 활동에 주력하지는 않았다. 사림은 성리학의 학문적 탐구와 윤리의 실천을 더욱 중시하고 관직은 형편에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였다. 사림도 정치를 통한 이상의 실천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관직 생활을 도외시하 지는 않았지만, 학문을 통한 개인적 수양을 전제 조건으로 여겼기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직업 관료들과는 성향이 달랐다. 16세기까지는 사림도 과거를 통하여 출사하는 경향이 많았지만, 점차 과거와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자체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을 처사(處士)나 유일(遺逸)로 칭하며 학자의 미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들 중에서 특히 명망이 있는 학자들은 조정의 부름을 받고 높은 벼슬에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을 흔히 산림(山林)이라고 하였다.
사림 학자들은 대체로 중소 지주 계층으로서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가지고 있어 관직이 아니더라도 학문을 계속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유향소(留鄕所)·향약(鄕約)·사마소(司馬所) 등을 통하여 지주적 지위를 강화하고 서원이나 서당(書堂) 같은 사학을 중심으로 학문과 교육에 열중하였다. 이들의 교육은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유교적 교양과 윤리를 수련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나아가 성리학의 철학적 탐구로까지 심화되었다. 사림의 성리학 연구와 실천이 깊어지면서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조선 성리학에서 특 히 이기론과 심성론을 깊이 연구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양을 통한 도덕성의 확립은 그들의 반대 세력이던 훈구파와의 정치 투쟁에서 명분과 선명성을 주는 것이었다.64)
사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격변기에 지방에 은거하였던 절의파(節義派) 학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들은 조선 초기까지 은둔해 있었지만 16세기에 이르면 대거 조정으로 진출하여 일정한 정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을 보통 정치 집단으로서 사림파라고 지칭하는데, 김종직과 그의 문인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체로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도덕 정치를 추구하는 이들 신진 세력은 관학 출신의 훈구 대신들과 정치적 성향이 달랐고, 또 그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기성 관료 집단을 견제하고 비판하였다. 이에 훈구 세력은 위협을 느꼈고 그 결과 많은 갈등과 마찰을 빚어 결국 네 차례에 걸쳐 사화(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사화 때마다 사림은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들은 교육 활동에 의해 양산된 두터운 예비 집단이 있었으므로 전면적으로 타도되지는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훈구파가 스스로 쇠퇴하고 사림파가 다시 도덕적 명분을 가지고 일어나게 되었고, 1565년(명종 20) 윤원형(尹元衡) 일당이 패퇴한 후에는 영구히 정치적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16세기 초에 일군의 학자 집단에 불과하던 사림파가 주도적인 정치 집단으로 성장하였던 것은 그들의 도학 실천 운동이 그만큼 큰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리학의 학문적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그것을 사회 저변으로 보급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사화로 인해 정치적 진출이 좌절된 동안 향리(鄕里)에 은거하면서 학문의 연구와 교육에 몰두함으로써 그들의 이상을 향촌 사회에 시행할 수 있었고 지지 세력을 넓힐 수 있 었다.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이황(李滉, 1501∼1570) 같은 학자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처음부터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도 많았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성수침(成守琛, 1493∼1564), 성혼(成渾, 1535∼1598), 조식(曺植, 1501∼1572) 등이 그러한 사람이다. 그들의 성리학적 이상 실천을 향한 열의는 높았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좌절되었을 때 그들은 이론적 탐구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심오한 학술 연구와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64) | 이성무, 「한국의 성리학」, 『한국 역사의 이해』, 집문당, 1995, 3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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