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예송과 사상적 대립
우선 기해예송은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의 상(喪)에 계모후(繼母后)였던 자의 대비(慈懿大妃, 조대비(趙大妃))가 입을 복제를 두고 남인(南人) 윤휴(尹鑴, 1617∼1680)·허목(許穆, 1595∼1682)의 삼년설(三年說)과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기년설(朞年說)이 서로 대립하면서 전개된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의 근본 원인은 인조의 장자였던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대신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던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즉위한 데 있었다.
소현 세자는 인질로 끌려가 있던 심양관(瀋陽館)에서 조선과 청나라 양국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나름의 재량권을 가지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인조와 그 측근 신하들에게 많은 오해와 의심을 받았다. 그는 억류된 지 9년 만인 1645년(인조 23) 2월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곧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종법 질서에 따른다면 종통(宗統)은 그의 아들인 원손(元孫) 석철(石鐵)에게로 돌아가야 하였으나 인조와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은 그의 동생 봉림 대군을 새로이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다.116) 이들은 전란 후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는 10세에 불과한 원손보다는 27세의 장년인 봉림 대군이 적합하다는 것을 주요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종법 질서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117)
이 와중에 소현 세자의 부인인 민회빈(愍懷嬪), 곧 강빈(姜嬪, ?∼1646)이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이른바 ‘강빈 옥사(姜嬪獄事)’가 발생하여 소현 세자의 세 아들 중 첫째, 둘째 아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강빈 가문은 역적 집안으로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강빈은 서인 사림층의 중망(重望)을 받던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인인 강석기(姜碩期)의 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강빈과 사림 사이에는 일정한 유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또 종법 질서에 따른다면 다음 왕이 되어야 마땅한 소현 세자와 그 아들이 즉위하지 못한 데 대한 의문과 강빈 옥사에 대한 의심이 겹쳐지면서 사림층 사이에서는 소현 세자에 대한 동정 여론이 폭넓게 형성되고 있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호서 지역 사림의 출사 명분(出仕名分) 중의 하나가 강빈의 원통함을 풀어 주자는 것에 있을 정도였다.118)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이러한 사림의 분위기를 인지하고 그들의 청의(淸議)에 부응하고자 북벌 대의(北伐大義)를 표방하였고, 김상헌(金尙憲), 김집(金集), 송시열, 송준길 등을 등용하였다. 하지만 효종의 재위 기간에도 강빈 옥사의 진실 규명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었고, 결국 강빈 옥사를 주도한 김자점 등은 청나라와 내통한 혐의로 죽음을 당하였다. 하지만 효종은 소현 세자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으므로 자칫 종통 문제로 비화(飛火)될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일 수 없었다. 더욱이 소현 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慶安君) 석견(石堅)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이는 매우 예민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 대비 복제 문제를 통해 그간 정리되지 않았던 정치적·사상적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던 것이다.
소현 세자와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봉림 대군이 왕위에 오 름으로써 적통(嫡統)과 종통은 어긋나게 되었다. 제왕가(帝王家)에서 적통과 종통의 불일치는 이에 대한 심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제왕가는 일반 사서인(士庶人) 가문과는 달리 지존한 위치에 있어, 적통·종통 문제는 국가와 사회의 기강 확립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는 여러 복잡한 정치적 사안도 결부되어 있었다. 곧, 소현 세자를 어떻게 보고, 효종을 어떻게 보며 나아가 인조대와 효종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복잡한 사안들이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예송은 논쟁 주체들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표면상 자의 대비의 복제가 논란이 된 것은 국상(國喪)의 복제를 규정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모후(母后)의 복에 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19) 따라서 여타의 규정을 찾아보고 이에 대한 가장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연구와 의견이 참조되었다. 당시는 15∼16세기를 거쳐 진행된 예학 연구의 성과를 통해 매우 정교한 의견들을 제시할 수 있는 학문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단 현행 예제(禮制)였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이나 『대명률(大明律)』에는 ‘어머니는 장자(長子)나 차자(次子)의 구별 없이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고례(古禮)라고 할 수 있는 『의례(儀禮)』나 주자학의 정통 예서인 『가례(家禮)』에는 어머니가 장자를 위하여 3년, 중자(衆子)를 위해서는 1년인 기년으로 정해져 있다. 특히 예법의 최고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의례』에 붙어 있는 각종 주석은 논의를 복잡하게 하였고, 그 중 당대(唐代)의 학자 가공언(賈公彦)의 주석은 논쟁 기간 내내 문제가 되었다. 가공언의 주석 중 ‘장자’와 ‘서자(庶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장자인가, 아니면 서자인가를 논하는 중요 사안이었다. 특히 서자라는 말 속에서는 ‘첩자(妾子)’라는 의미도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효종을 폄하하는 위험한 해석이 될 수도 있었다.
『의례』 상복편(喪服篇) 참최장(斬衰章)에는 ‘부위장자(父爲長子)’조가 있다. 이 장은 아버지가 장자의 상에 참최복을 입는 경우를 설명한 대목이었다. 장자는 종통의 계승자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자를 의미하며, 이 때문에 아버지는 장자를 위해 참최복을 입는 것이었다. 가공언은 나아가 장자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하였다. 원래는 적처 소생(嫡子所生)의 제일자(第一子)를 의미하지만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第二子)를 세우고 그를 또한 장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를 ‘차장자설(次長子說)’이라고 한다. 이것에 따르면 효종은 인조의 차장자가 되며 자의 대비는 자최(齊衰)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 이는 허목의 주장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가공언이 다른 곳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 가공언은 승중(承重), 곧 대를 계승하지만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설명하였다. 이것을 이른바 사종설(四種說)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는 정체부득전중(正體不得傳重)으로 적자에게 질병이 있어 종묘의 제사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 두 번째는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로 서손(庶孫)으로 후사를 삼은 경우, 세 번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서자를 세워 대를 이은 경우, 네 번째는 정이불체(正而不體)로 적손을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이다. 이 사종설 중에서 문제가 된 것은 세 번째 체이부정 항목이었다.
송시열은 체이부정을 들어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송시열에 따르면, 가공언의 차장자설은 장자가 어린 나이에 죽어 장자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소현 세자의 경우에는 이미 장자의 본분을 다하였으니 가공언의 차장자설은 적용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곧 소현 세자를 인조의 첫째 아들로,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고, 둘째 아들이 대를 이은 경우 삼년설을 적용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송시열은 형제들 사이에서의 윤서(倫序)를 중시하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제왕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서자’의 해석 문제였다. 『의례』에는 서자를 장자가 아닌 중자의 의미로 보기도 하고 첩자로 보기도 하는 등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랐다. 송시열 등 서인은 체이부정에서 서자를 중자로 보아 효종을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허목은 서자를 일반적으로 쓰는 첩자로 보고, 따라서 효종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서인이 서자를 중자로 보아 효종을 둘째 아들로 여기고 삼년설에 반대한 것은 참최는 두 번 입을 수 없다는 ‘불이참(不二斬)’의 관념 때문이었다. 만약 장자가 죽은 후 참최복을 입고, 제이자가 장자가 된 후 죽으면 다시 참최복을 입고, 제이자가 죽은 후 제삼자가 장자가 된 후 또 죽으면 다시 참최복을 입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설명이었다.
이러한 송시열 등 서인 측의 기년 복제 논리는 인조반정 과정에서 서인이 견지하였던 정치 논리와도 상당 부분 일치하였다. 예송에서 서인 측은 비록 종통을 중시하는 제왕가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장유의 차서(次序)와 모자의 관계를 사대부가(士大夫家)와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제왕가는 그 특수성 때문에 군신 관계가 어느 가치보다 우선 적용되어야 하지만 제왕가도 하나의 가족 공동체인 만큼 그것에 합당한 가족 윤리 체계를 가져야 하며 또한 이를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인조반정 과정에서 서인이 광해군대 북인 정권을 공격하였던 중요한 논리이기도 하였다.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유교 윤리의 가장 커다란 변고로 인식하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광해군 정권의 윤리적 부당성을 선전하였던 서인으로서는 이와 같은 가족 윤리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왕가도 일단 가(家)인 이상 가족 윤리 체계 속에서 본다면 어떠한 경우에서든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이는 것은 보편적인 인정상 용인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서인 측은 이러한 점을 파고들면서 사대부가 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인조반정의 윤리적 명분을 얻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왕가라는 특수성보다는 제왕가도 일단 가족인 이상에는 장유의 차서와 모자의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정립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사대부가와 제왕가의 예가 같지 않다는 의견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인식 위에 종법 질서의 원칙 문제와 소현 세자와 강빈의 억울한 죽음 등이 겹치면서 서인 측에서는 기년설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년설이 국제(國制)인 『경국대전』의 조항과도 서로 어긋나지 않다는 점은 그들에게 더욱 힘이 되어 주었다.120)
한편, 재최 삼년설과 기년설과는 대조적으로 윤휴는 참최 삼년설을 주장하였다. 윤휴는 장자를 위해서는 상하 구분 없이 누구나 삼년복을 입으며, 또 임금을 위해서는 내외종(內外宗) 모두 다 참최를 입는다는 『주례(周禮)』의 근거를 들어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윤휴의 삼년설은 제왕의 종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종통을 이은 자가 사실상의 적통도 이은 것이라고 하여 종통을 극도로 중시하였다. 따라서 효종은 종통과 적통을 동시에 이은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주례』에서 말한 ‘위천왕참(爲天王斬)’설을 근거로 참최를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윤휴는 제왕례(帝王禮)의 특수성을 들어 장유의 차서나 모자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제왕과 신하라는 군신 관계 속에서 참최 삼년설을 주장한 인상이 짙다. 윤휴 참최설의 주된 근거는 『의례』의 “천자 제후에게는 참최만 있고 재최는 없다.”와 “제후와 오복(五服)의 친족이 되는 사람은 모두 참최를 입는다.”121)라는 말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윤휴의 참최 삼년설은 광해군대 북인계 학풍에서 보였던 엄격한 군신 관계의 적용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다. 윤휴는 실제 북인계에서 분화된 남인의 당색(黨色)을 가지고 있었다. 제왕이 된 이상 모든 사회적 관계는 제왕과 신하로 귀결되며, 그 속에 형제간의 차서와 모자간의 관계는 부차적인 것 내지 무시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광해군대 북인 정권은 이러한 의식 속에서 당시 정서상으로 볼 때 다소 무리한 정치적 행동을 감행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폐모살제’였다.122) 이는 광해군대 북인 정권의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이 사건을 군신 관계 속에서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효율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였으며, 서인 측의 폐모살제 정권이라는 비윤리성 제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는 북인 정권이 계속 유지되지 못한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광해군과 북인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제왕가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군신 관계를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시하므로 어머니와 동생을 가족 이전에 신하로 보고서 역모를 꾀한 신하를 폐하고 죽이는 것은 나름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행위였다.
윤휴의 참최 삼년설은 삼년설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허목과 일치하였지만 모자의 친속 관계를 무시하고 신하의 복제인 참최를 주장한 점에서 는 사실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허목은 참최는 신하의 복제로서 어머니를 신하로 만드는 설이라고 하여 윤휴의 참최 삼년설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는 허목이 광해군대 북인 정권의 군신 관계 중심의 가치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허목은 신하의 복제인 참최를 취하지 않고 가족의 복제인 재최를 주장하였다. 허목의 재최 삼년설 주장은 송시열의 기년설 주장과는 달랐지만 윤휴의 “어머니를 신하로 만든다.”는 신모설(臣母說)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정리하면 윤휴는 효종의 종통 계승을 중시하여 군신 관계 속에서 참최 삼년설을, 허목은 효종을 종통의 중심에 놓은 후 가족의 모자 관계를 중시해 재최 삼년설을, 송시열은 제왕가 예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적인 가족 질서를 더욱 중시해 기년설을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사람의 견해는 서로 공통점과 상이점을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때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상소가 예송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123) 윤선도는 허목의 재최 삼년설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송시열, 송준길의 기년설을 극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송시열의 기년설은 종통을 둘로 만들고 임금을 비하하는, 곧 ‘이종비주(貳宗卑主)’의 논리라고 비판하였다. 국가의 종통이 혼란스럽게 되면 국가는 위기에 빠져 버린다고 하여 당시의 상황을 매우 긴박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윤선도의 주장은 예법이 조선 사회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서인 측이 윤선도를 공격하였는데 효종의 사부(師傅)를 지낸 이유로 그는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윤선도의 상소는 단순한 복제 문제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을 종통·적통과 직결된 인조, 소현 세자, 효종의 위상 문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정치적 긴장과 대결을 촉발시킨 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조관(朝官)들이나 학자들이 모두 복제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124) 하지만 이미 복제 자체에 종통과 적통의 문제가 함의되어 있었고 조야(朝野)의 예학 이해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상황에서, 윤선도와 같은 주장을 담은 상소가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에 불과하였다.
이렇듯 의견이 분분하여 사실상 어느 한 가지로 복제를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정태화(鄭太和, 1602∼1673)는 고례가 아닌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기년복으로 정하고 이를 공포하였다. 이는 『경국대전』에 의거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송시열과 송준길의 예론을 채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학의 원천이라고 할 고례의 이해가 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고례에 근거하지 않고 복제를 결정한 것은 미봉책이었을 뿐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고례에 입각하여 명확한 설명 속에 복제가 확정되어야 하였는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임시로 복제를 정함으로 써 훗날 다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소지를 남긴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 예송의 재발이 예견되고 있었다. 예송은 성균관 유생이나 지방 유생들에게까지 파급되어 다양한 연명 상소(聯名上疏)가 조정에 올라와 점차 서인과 남인의 갈등이 증폭되어 가는 모습을 띠었다.
제1차 기해예송이 끝난 후 쟁점은 다시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정태화의 기지로 인해 고례가 아닌 『경국대전』에 의거, 기년설을 채택하여 다수파였던 서인 측의 의견을 반영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기해 복제는 고례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엄격히 볼 때 서인과 남인 어느 한쪽 의견을 채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태화는 송시열의 의견을 존중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결과적으로 서인 측의 의견과 일치함으로써 겉으로 보기에 서인은 예송에서 승리한 듯이 보였다. 조야에는 이러한 인식이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기년설이 확정된 뒤 연이어 나온, 조경(趙絅), 홍우원(洪宇遠), 김수홍(金壽弘), 서필원(徐必遠) 등의 허목 설을 지지하고 송시열 설을 공격하는 상소와 글은 저간의 사정을 보여 준다.125)
116) | 이영춘, 『조선 후기 왕위 계승(王位繼承) 연구』, 집문당, 1998, 197∼20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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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 지두환, 「제3장 조선 후기 예송(禮訟) 연구」, 『조선 후기 사상사의 재조명』, 역사 문화, 1998, 305쪽. |
118) | 이건창(李建昌), 『당의통략(黨議通略)』, 인조조 지효종조(仁祖朝至孝宗朝). |
119) | 이영춘, 앞의 책, 217쪽. |
120) | 『현종실록』 권2, 현종 원년 4월 16일(경자). |
121) | 윤휴(尹鑴), 『백호전서(白湖全書)』 권26, 전례사의(典禮私議). |
122) | 여기에 관해서는 정호훈, 『조선 후기 정치 사상 연구』, 혜안, 2004, 64∼78쪽 참조. |
123) | 이영춘, 앞의 책, 229쪽. |
124) | 이영춘, 앞의 책, 231쪽. |
125) | 이성무, 「17세기 예론(禮論)과 당쟁(黨爭)」, 『조선 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2, 5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