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과 갈등

4. 예송의 전개와 사상적 갈등

[필자] 조성산

성리학적 정치 이념이 조선 사회에 정착하면서 점차 이에 대한 갈등 양상도 함께 드러났다. 성리학 이해가 심화되면서 성리학을 좀 더 철저히 현실 사회에 응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갈등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주로 조선 후기 사회에서 보였고, 대표적인 것으로 예송과 호락 논쟁을 들 수 있다. 특히 왕실의 종법(宗法) 질서를 어떻게 준수하고 적용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예송은 조선 후기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예법 질서에 대한 의식과 학문 수준을 잘 보여 준다.115)

그간 예송에 대한 적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예송은 단순한 복제(服制) 논쟁이나 당쟁(黨爭)의 소산이 아닌,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첨예한 정치적·사상적 문제가 반영된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조선 사회가 성리학의 예법(禮法)과 문치(文治)를 국가 운영의 기본 틀로 설정할 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논의라고 할지라도 이는 곧 국가 운영과 긴밀한 관련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모든 것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왕실과 관련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될 수 없었다. 여기에 예송이 가졌던 국가적·사회적 영향과 중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예송은 일반적으로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필자] 조성산
115)다음 이종휘(李鍾徽)의 말은 종법(宗法)이 갖는 당시 사회적 맥락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종휘, 『수산집(修山集)』 권1, 「초계정씨종계좌목서(草溪鄭氏宗稧座目序)」. “古者立宗法 王政之首也 所以收合天下之族 而使民厚也 及夫後世 宗法壞而俗薄(옛날에 종법을 세우는 것은 왕정의 첫 시작이었다. 이는 천하의 종족을 수합하여 백성들을 두터이 하고자 위함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종법이 무너지고 풍속은 부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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