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인예송과 정치 변동
제2차 갑인예송은 갑인년(甲寅年)인 1674년(현종 15) 2월 23일에 효종 비인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갑인예송은 인선 왕후의 상에 자의 대비가 어떠한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났다. 인선 왕후가 장자의 며느리라면 자의 대비는 기년복을 입어야 했지만, 둘째 아들의 며느리라면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1차 기해예송에서는 『경국대전』에 장자와 중자에 대한 복이 모두 똑같이 기년복이었기 때문에 고례에 의존하지 않고도 국제에 의거하여 기년복으로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며느리 복(子婦服)에 대해서는 고례인 『의례』에는 장자부(長子 婦)는 9개월 상복을 입는 대공(大功), 중자부(衆子婦)는 5개월 상복을 입는 소공(小功)으로 나뉘어 있었고, 『경국대전』에는 각기 기년과 대공으로 정해져 있었다. 고례뿐만 아니라 국제에서도 장자부와 중자부의 구분이 명확하여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인가, 중자로 볼 것인가 하는 판가름은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126) 여기에는 제1차 기해예송에서 불명확하게 넘어간 일을 명확히 규정해야 하는 많은 부담이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복제를 장자의 며느리에게는 기년으로 한다는 국제에 의거하여 기년으로 정하여 올렸다. 하지만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그렇게 할 경우 기해년 송시열의 사종설과 크게 어긋난다고 하면서 둘째 며느리의 복으로 해야 한다고 상소한 후 다시 예조는 대공으로 고쳐 왕에게 아뢰었다.127) 이것을 두고 『현종실록』의 사관(史官)은 박세당이라는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의견을 낸 사람을 송시열에 아부하여 복제를 바꾸려 한 자로 지적하였다.128) 그러나 실상 박세당은 현종대 송시열과 대립적인 위치에 있던 한당(漢黨)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오히려 박세당이 송시열의 사종설을 끌어들여 복제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유도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사건이 있은 지 5개월 후인 7월 6일에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대왕대비 복제의 과오를 지적하였다.129) 그 내용은 서인 측이 대공으로 정한 이유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것으로, 복제를 대공으로 정함은 부당하며 나아가 기해년 당시 대왕대비의 복제도 문제 삼았다. 도신징이 영남의 대구 유생인 점과 그의 의견이 남인 측의 입장을 반영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남인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신징의 상소를 본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1626∼1690)에게 국제에 의해 기년으로 정하였는데 지금의 대공 역시 국제에 의한 것인지를 물었다. 김수흥은 기해년에는 국제와 고례를 참작하여 기년으로 정하였고 이번에도 국제와 고례를 참작하여 대공으로 하였음을 언급하였다. 이를 모호한 답변으로 판단한 현종은 대신들을 소집하여 복제를 재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빈청(賓廳)에서 논의가 이루어져 다음과 같은 의견이 제시되었다. 빈청의 제일계(第一啓)에서는 기해 복제는 조정에서 장자와 중자를 구별하지 않은 국제에 의해 기년으로 정하였으나 세간에서는 이를 고례에 의한 중자 기년복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하였다. 제이계(第二啓)에서는 『경국대전』과 같은 현행 예제에는 장자·중자에는 모두 기년이고 장자부에는 기년, 중자부에는 대공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 승중 여부는 따로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대공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제삼계(第三啓)에서는 기해 복제는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없는 복제였으나 형제의 순서로 말하면 장자와 중자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효종과 인선 왕후는 중자·중자부에 해당하며 특히 『경국대전』에는 “중자가 승통(承統)하면 장자가 된다.”는 명문이 없기 때문 에 기해년의 국제 기년은 중자복으로 봐야 한다고 하였다. 제사계(第四啓)에서는 고례인 『의례』에서 차장자가 승중하면 장자가 된다는 조항은 특별히 제일자가 폐질로 죽었을 경우에나 해당되는 것이며 그 외는 모두 승중하였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체이부정의 경우로 보아야 하니 국제의 중자부복(衆子婦服)인 대공복을 쓰는 것은 『의례』의 본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현종이 수긍할 리 없었다. 현종은 둘째 아들도 장자가 될 수 있다는 ‘차장자설(次長子說)’을 들어 체이부정 주장의 부적절함을 지적하였다. 여기에 당대 정치 실력자이자 숙종의 외척(外戚)인 김석주(金錫胄, 1634∼1684)가 남인들과 함께 이를 지지함으로써 송시열계 서인의 대공설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공격은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결국 서인과 남인 간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130)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인이 모든 권한을 장악하면서 권력 전면에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송시열계 서인이 배제된 채 김석주 등 척신계(戚臣系) 서인과 남인의 연합 정권이 등장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러한 상황은 예송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사실 현종대 내내 김석주가 속해 있던 한당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산당(山黨)의 대립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진행되어 온 정국 변동의 결과물이었다.131)
126) | 이영춘, 앞의 책, 23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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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 『현종개수실록』 권22, 현종 15년 2월 27일(임술). |
128) | 『현종실록』 권22, 현종 15년 2월 27일(임술). |
129) | 『현종실록』 권22, 현종 15년 7월 6일(무진). |
130) | 갑인예송으로 인한 정국 변동에 대해서는 이영춘, 앞의 책, 260∼270쪽을 참조할 수 있다. |
131) | 한당(漢黨), 산당(山黨) 및 그 대립에 관해서는 정만조, 「조선 현종조(顯宗朝)의 사의·공의(私義·公義) 논쟁」, 『한국학 논총』 14, 국민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1991 ; 정만조, 「17세기 중반 한당(漢黨)의 정치 활동과 국정 운영론(國政運營論)」, 『한국 문화』 23, 서울 대학교 한국 문화 연구소, 1999를 참조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