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의 역사적 의의
예송이 가져다준 정치적 파급은 실로 엄청났다. 예송을 통해 서인과 남인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명확히 확인하였으며 이후 극렬한 당쟁으로 가는 본격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갑인예송을 거치면서 송시열은 윤휴와 남인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으며, 남인을 반주자학파로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주자서(朱子書) 연구와 주자 절대주의에 본격적으로 경도되기 시작하였던 것은 갑인예송에서 패퇴한 뒤 유배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석서(註釋書)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예송은 결국 서인과 남인의 당쟁을 촉발시키고, 서인 내에서의 노론과 소론이 분기(分岐)하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친 정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송을 당쟁으로만 연결시키는 것은 이 논쟁의 올바른 이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예송은 서인과 남인 간의 사상과 정치의 입장 차이, 서인 내에서의 다양한 사상적 차이가 급변하는 정치적 함수와 함께 결부되면서 일어난 논쟁이기 때문이다. 예송은 서인과 남인 간의 경세관의 차이뿐만 아니라 서인 안에서의 다양한 분화까지도 고려해야 그 논쟁의 사상적 기원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추론할 수 있다.
[필자]
조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