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2. 원의 이중적 고려관과 중화적 세계관부정부패와 하급 문명의 나라

고려의 예속화와 부정론의 확산

활리길사의 노비제 개혁안이 부정적인 고려관에 기인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송환 후 원나라가 취한 행보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원나라는 “중서성에 명하여 공문을 보내어 고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보내왔다. 아울러 황제는 고려의 신료(臣僚)에게 “마음을 다해 바른 것을 받들고 각자의 직분을 닦아야 할 것이다. 감히 이전의 비리를 잇거나 불법 방자하게 굴면 고려 왕이 너희를 용납할지 모르겠으나 짐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201) 내용을 고지하였다. 극히 원론적인 내용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전의 비리’나 ‘불법 방자’라는 단어만 보더라도 원나라 황제가 당시 고려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장안사>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이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1434년(충혜왕 후 4) 고려 출신으로 순제의 제2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가 황제와 황태자를 위하여 장안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이때 고려 출신 환관으로 자정원사(資政院使)였던 고용보가 큰 역할을 하였다. 원나라 황실은 금강산에 담무갈보살이 머무르고 있다고 하여 이 산 일대의 사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고용보는 금강산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고려 출신 환관의 전횡은 고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원나라 조정에 확산시켰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예속성의 정도와 비례하여 심화되었다. 원나라에 대한 고려의 예속성이 강해질수록 부정론이 커졌다. 그것은 또한 고려인의 원나라 조정의 참여나 권력 획득과 연동하여 더욱 확대 재생산되었다. 특히 몇몇 고려 출신 환관(宦官)이 원나라의 정쟁(政爭)에 참여하여 권력을 농단(壟斷)하는 지경에 이르자 고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예를 들어 원 순제(順帝) 때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 ?∼1362)에 대해 당시 감찰어사(監察御史)였던 이직(李稷)은 “(그는) 은혜와 사사로움에 기대어 조정을 침탈하고 위복(威福)을 함부로 하며 당시 재상들과 교통하여 청알(請謁)을 공공연하게 하여 나라의 큰 화가 되었으니, 청컨대 그를 내치셔서 나라의 형정을 바로잡으십시오.”라고 탄핵하였다고 한다.202) 고용보에 대한 미움은 원나라에서 그를 금강산으로 유배 보낸 1347년(충목왕 3)에 극에 달하였다. “이때 고용보는 황제의 측근에서 권력을 부리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고용보는 고려의 매장(煤場) 사람인데, 황제의 은총을 믿고 마음대로 권력을 부리어 친왕(親王)이나 승상(丞相)까지도 그를 쳐다보고 쫓아가 절해야 하며, 뇌물을 모아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고 있으니 한나라의 조절(曹節)과 후람(侯覽), 당나라의 구사량(仇士良)과 양복공(楊復恭)이 오늘날에 다시 일어난 듯합니다. 바라건대 그를 베어서 천하의 민심을 통쾌하게 하시옵소서.’라고 하였던”203)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권력 농단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워하여 고용보를 온갖 악행을 저질러 나라를 멸망에 이르도록 하였던 한나라나 당나라의 환관으로까지 비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용보 같은 고려 출신 환관에 대한 이처럼 지독한 미움은 고려에 대한 부정론으로 이어질 소지가 많았다.

부정적 인식을 결정적으로 확산시킨 사건은 기황후(奇皇后)의 황후 책봉과 그에 따른 고려인의 득세였다. 당시 기황후의 책봉에 대해 많은 원나라 관리들은 “쿠빌라이가 일찍이 고려와 더불어 일을 함께하지 말 것을 맹세하였다.”거나, “쿠빌라이 황제의 가법(家法)에는 천한 고려 여자를 입궁(入宮)시키지 말라고 하였다.”며 쿠빌라이의 권세를 빌려 기황후의 황후 책봉을 완강히 반대하였다.204)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었다. 고려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던 황제였으므로 쿠빌라이가 고려와 일을 함께 도모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두 번째 핑계 역시 개연성이 적다. 당시 몽골의 황실 혼인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었는데, “(옹기라트가) 딸을 낳으면 대대로 후비로 삼고, 아들을 낳으면 대대로 공주를 맞아들이도록 한다.”는205) 것이 그것이었다. 즉, 몽골은 황실인 황금 씨족의 혼인 대상을 정해 두기는 하였어도 혼인하지 말아야 할 상대를 정해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 원나라 관리들은 별다른 근거 없이 고려를 자신들과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는 나라이거나 고려의 여인을 ‘천한 사람’으로 취급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부정론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부정론은 기황후가 황후로서 권력을 농단하게 되자 더욱 강화되었다. 명나라 초기 인물인 권형(權衡)이 편찬한 『경신외사(庚申外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기황후가 고려의 미인을 많이 데리고 있으면서 대신 가운데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냈다. 따라서 당시 원나라 수도의 고관과 귀인은 반드시 고려 여자를 얻은 뒤에야 명가(名家)라고 하였다. 고려 여자들은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며 섬기기를 잘하여 이들이 이르면 대부분 사랑을 차지하였다. 순제 이후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태반이 고려 여자였으므로 의복, 신발, 모자, 물건 등이 모두 고려의 것을 따르게 되었다.”는206) 것이다. 이는 기황후가 고려의 여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였고, 또한 고려의 여인들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다른 여인들의 사랑을 빼앗았다는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으로 서술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은 원나라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명나라 사람의 인식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원나라 말기에 있었던 고려에 대한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원나라 문인의 기록에서도 유사한 언급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인(北人, 몽골인)의 여자 급사(女使)는 반드시 고려녀(高麗女) 가운데 어린아이를 얻어야 하였으며 가동(家僮)으로는 반드시 흑인 노비(黑厮)를 얻어야 하였다.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벼슬살이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207) 한 엽자기(葉子奇)의 말이 그것이다.

[필자] 이정란
201)『고려사』 권32, 세가32, 충렬왕 27년 4월 기축.
202)『원사』 권185, 열전72, 이직(李稷).
203)『고려사절요』 권25, 충목왕 3년 6월.
204)장동익, 앞의 책, 1994, 191쪽.
205)김호동, 앞의 책, 68쪽.
206)권형(權衡), 『경신외사(庚申外史)』 권1 : 『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 사부(史部), 잡사류(雜史類).
207)엽자기(葉子奇), 『초목자(草木子)』 권3, 잡지(雜誌) ; 장동익, 앞의 책, 1994,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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