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명 국가, 고려
고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때로는 고려의 문화를 비문명으로 비하하거나 심지어 야만시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하였다. 대표적 사례가 동성혼(同姓婚) 금지 조치이다.
일찍이 세조 지원 12년(충렬왕 1)에 세조 황제께서 아독인(阿禿因)을 보내 성지(聖旨)를 전한 것을 받들었다. 또한 세조 지원 28년(충렬왕 17)에 내가 정가신(鄭可臣), 유청신(柳淸臣) 등과 더불어 자단전(紫檀殿)에 나아가 친히 세조 황제의 성지를 받들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동성이 통혼(通婚)할 수 없음은 천하의 통리(通理)이다. 하물며 너희 나라는 문자를 알고 공자의 도를 행하니, 마땅히 동성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때 이수구(李守丘)가 유청신에게 말을 전하였고 또 통역하여 정가신에게도 전하였으나, 본국에서는 인순(因循)하고 갑자기 고치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종친으로서 동성과 혼인하는 자는 성지를 어긴 것으로 죄를 다스릴 것이니, 종친은 마땅히 여러 세대 동안 재상을 지낸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재상 집안의 아들이라야 종실의 딸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208)
쿠빌라이는 1275년(충렬왕 1)에 이미 고려의 동성혼을 비판하는 황제의 명령서를 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고려가 근친혼(近親婚)의 습속을 버리지 못하자 1291년(충렬왕 17)에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직접 불러 ‘문자를 알고 공자의 도를 행하는’ 나라인 고려에서 근친혼을 행해서는 안 되는 점을 강변하며 동성혼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사실 중국인에게 근친혼은 반문명성의 정도를 측정하는 주요 척도(尺度)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중국적 기준에 따르면 몽골인의 혼례도 반문명성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수계혼(收繼婚)이라는 전통이 있었다. 수계혼은 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와 혼인하거나,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부인이나 할아버지의 부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결혼을 이르는 말이다. 물론 같은 혈통끼리 혼인하는 근친혼과는 달랐지만 부계적 가족 질서와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는 중국 문화에서 그것 역시 ‘금수(禽獸)처럼’ 여겨지 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원나라에서도 한인이나 고려인에게 수계혼을 강요하지는 않았다.209) 그런데 쿠빌라이는 몽골의 수계혼이 존속하는데도 고려의 근친혼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이는 정복자로서 자신의 전통에서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고 고려의 혼속(婚俗)만을 비문명성이라는 척도로 재단한 것이라 하겠다.
원나라 사람들이 고려의 비문명성에 트집을 잡는 경향이 증가함에 비례하여 고려인은 점차 원조(元朝)의 찬란한 문명을 찬탄하였다.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원나라를 중국의 정통 왕조로 인정하면서 “토지는 광대하고 인민은 많으니, 개벽한 이래로 이런 나라 처음이네.”라고 극찬하였다.210) 이색(李穡, 1328∼1396)은 “원나라가 일어난 지 100여 년에 문치(文治)가 크게 화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모두 그의 재능을 정숙하게 다하니 찬란하게도 일대의 성세(盛世)를 이루었다.”고 하였다.211) 나아가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송나라는 서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니, 쇠잔한 나라 서생에게 맡겼네. 성스러운 원나라는 사해(四海)에 거울처럼 맑으니, 흉중(胸中)의 10만 군사를 사용하지 않았다오.”라고 하여 중원 왕조였던 송나라보다 원나라를 높게 평가하기에 이르렀다.212) 물론 단군 신화를 처음 수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 같은 역사서의 등장과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 왕조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인식의 대두에서 보이듯이 당시 고려인이 독자성을 높이고자 하였음은213)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몽골 문명의 융성함에 위축되어 원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거나 오해할까 전전긍긍하기도 하였다. 최해는 자신이 『동인지문(東人之文)』을 편찬한 목적을 “원나라 문인이 간혹 우리나라 사람들(東人)의 글을 보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곧 책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는데,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214)
몽골인을 처음 대하였을 때 그들의 야만성을 경멸하며 자신을 문명인으로 자부하였던 고려가 100여 년간의 복속과 간섭을 겪은 뒤 관계의 역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몽골인은 스스로의 문명을 자랑하면서 고려의 문화를 비하하거나 강제적으로 고치려 하였던 반면, 고려인은 원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문명을 비웃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원나라의 찬란한 문명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100년간의 복속과 간섭이 고려를 그렇게 만들었다.
208) | 『고려사』 권33, 세가33, 충선왕 즉위년 11월 신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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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 史韋民, 『元代社會生活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6, 57, 69쪽. |
210) | 이익주, 『고려·원 관계의 구조와 고려 후기 정치 체제』, 서울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6, 73쪽. |
211) | 『동문선(東文選)』 권102, 「서상찰보정설암대자권후(書上札補正雪菴大字卷後)」 ; 장동익, 앞의 책, 1994, 216쪽. |
212) | 이제현(李齊賢), 『익재난고(益齋亂藁)』 권3, 경주(涇州) ; 김인호, 앞의 글, 142∼143쪽. |
213) | 이익주, 앞의 글, 73∼74쪽. |
214) | 최해, 『졸고천백』 권2, 동인지문서(東人之文序) ; 장동익, 앞의 책, 1994, 2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