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태조의 형식적 조공-책봉 체제
따라서 주원장에게는 앞으로 복원할 조공-책봉 체제가 실질적인 내용을 갖춘 것이 아니라 명목적인 관계에 그친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상대국(相對國)이 “소(小)로서 대(大)를 섬긴다.”든가, “신하로 칭하며 공물을 바친다.”라는 외교적 수사(修辭)를 사용하며 형식적인 종속 관계(從屬關係)를 따른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217) 그러므로 초창기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밀월(蜜月) 관계에 가까웠다. 고려가 비교적 적극적으로 사대(事大)를 표명하였기 때문이다. 1364년(공민왕 13)에 주원장이 사신을 파견하여 왕조의 성립을 통고하였을 때 공민왕은 즉각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중지하며 봉작(封爵)을 요청하였고, 명나라 역시 그것에 응하여 공민왕을 고려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불행한 사태로 양국의 관계는 악화 일로(惡化一路)로 치달았다. 그것은 1367년(공민왕 16)에 요동에 있던 원나라 출신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명나라의 군사 보급 기지였던 우가장(牛家莊)을 습격하는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명 태조는 습격 사건에 고려가 공모하였다고 확신하면서 고려를 불신하였다. 그 뒤에 연이어 일어난 공민왕 시해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의 피살 사건으로 양국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관계 냉각의 근본 이유는 당시 명나라의 요동 진출과 관련이 있었다. 명나라는 이제 막 차지한 요동 땅을 경영하는 데 고려가 혹시 방해될까 염려하여 그때부터 고려에 대해 위압적 자세로 일관하였던 것이다.218)